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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모든 것을 다 아는 바보</title>
		<link>http://www.eesoul.net/tc/freesty/</link>
		<description>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받아들이고 포용해야 한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버리고 자기 인생을 탐구하는 데 바쳐야 한다.</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Tue, 05 Apr 2011 04:25:1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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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모든 것을 다 아는 바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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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받아들이고 포용해야 한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버리고 자기 인생을 탐구하는 데 바쳐야 한다.</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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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일단 블로그 이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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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P&gt;&lt;BR&gt;이솔넷이 블로그 연동 형에서 일단 게시판 체제로 가기로 했고, 또 이솔넷 블로그가 덧글도 안달리고 트랙백도 이상하고 아무튼 시스템이 뭔가 이상한 관계로 일단 티스토리로 도피합니다 ㅠㅠ&lt;/P&gt;
&lt;P&gt;&lt;A href=&quot;http://freesty.tistory.com/&quot;&gt;http://freesty.tistory.com/&lt;/A&gt;&lt;BR&gt;&lt;BR&gt;뭐 전역하기 전까지 티스토리 블로깅이 가능할까 싶긴 합니다만 orz&lt;/P&gt;
&lt;br /&gt;</description>
			<category>잡담</category>
			<author>(프리스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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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www.eesoul.net/tc/freesty/entry/%EC%9D%BC%EB%8B%A8-%EB%B8%94%EB%A1%9C%EA%B7%B8-%EC%9D%B4%EC%A0%84-1#entry64comment</comments>
			<pubDate>Fri, 01 Jan 2010 12:53:5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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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잡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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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BR&gt;1. &amp;lt;에반게리온 파&amp;gt;를 두 번 봤다. 신지가 레이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에서 계속 눈물을 글썽일 수 밖에 없었는데, 정확히 제작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039;자신이&#039; 구원하지 못했던 레이 - 나 뿐 아니라 많은 감상자들이 신지와 자신을 동일시했을테고, 또 그런 관점에서 레이가 구원받기를 원하는 SS들도 쏟아져나왔다 - 를 이번에야 말로 구하고자 하는 제작진의 일념이 느껴져서 좋았다. 소년기에 에반게리온을 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마음 한켠에 이 세계관의 인물들에 대한 마음의 부채가 남아있을 것이다. 신극장판은 그 부채를 해소할 수 있는, 묵은 아쉬움을 털어내는 계기가 된 것 같다.&lt;BR&gt;&lt;BR&gt;&lt;BR&gt;2. 여러모로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해야만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에 어떻게 손을 뻗치는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오랜만에 고교 동창을 만났는데,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어떻게든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많이 느끼게 되었다. 나는 할 수 있었던 일들을 이제까지 제대로 해 왔는가, 에 대한 반성.&lt;BR&gt;&lt;BR&gt;&lt;BR&gt;3. 투쟁을 하기 이전에, 싸워 이길 수 있을 능력을 갖추고 준비를 마치고 전의를 가다듬는 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이승환이 이런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quot;부조리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 내 안에 숨지 않게 나에게 속지 않게, 그런 나이어 왔는지 나에게 물어본다.&quot; 나 역시 그 것에 대하여, 과거의 나에게 지금의 나에게 또 미래에 나에게 계속 물어본다.&lt;BR&gt;&lt;BR&gt;&lt;BR&gt;4.&amp;nbsp; 플레브스의 &#039;술자리 하나&#039;라는 글은 &lt;A href=&quot;http://plebs.tistory.com/15&quot;&gt;http://plebs.tistory.com/15&lt;/A&gt; 나에게도 많은 고민을 던져주는 글이다. 김민하의 &amp;lt;레닌을 사랑한 오타쿠&amp;gt;라는 책을 인상 깊게 읽었는데, 돌이켜 보면 그가 &#039;의식화&#039;되던 과정과 내가 그리 되던 과정이 그리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인터넷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나름의 &#039;참여&#039;를 시작했다는 것이고, 나는 그 때 대학이 뭔가 가르쳐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술을 먹었던 것에서 길이 달라졌던 것 같음.&lt;BR&gt;&lt;BR&gt;&amp;nbsp;이렇게 말할 때 나는 또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신입생 때의 나는 분명 &#039;학문으로 대성해야지!&#039;라는 것에 대해 상당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것은 부모님의 기대와 재수를 했다는 자괴감에서 나온 것이기도 한데, 재수까지 해놓고 밥벌이 안되는 사학과를 갔다는 것에 대한 부모님의 안타까움에 대해 나는 &quot;나는 본래 역사학을 좋아했다! 그리고 나는 역사학을 가지고도 (남들 이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quot;라고 맞섰던 것이다. 신입생 때 나는 상당히 모순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결국 경쟁적 학벌 구도에서 성공해야한다는) 재수생의 마인드와 (세상을 바꾸는 이론을 만들고 싶다는) 얼치기 인문학도의 빈약한 이상이 대학에서 배울 것들에 대한 과도한 기대로 이어졌던 것 같다.&lt;BR&gt;&lt;BR&gt;&amp;nbsp;그러나 내가 게을렀건, 아니면 환경이 그렇게 되지 못했든 결국 대학에서 나는 나에게 무언가 &#039;가르쳐줄&#039; 누군가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고, 거기서 &#039;고아 의식&#039;이랄 것이 생겼던 것 같다. &#039;구습을 버리지 못한 운동권&#039;, &#039;상아탑에서 안주하는 교수사회&#039; &#039;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며 자기 생각을 갖지 못한 대학생들&#039; 등의 시선으로 학교라는 곳을 전형화시켜버리고 나 자신도 망가졌던 것이다. 다행히 좋은 벗들의 도움으로 책 읽기라는 행위만은 놓아버리지 않고 군대에서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이제 군대라는 도피(?) 공간을 떠나게 될 나는 앞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공부를 하지 않으며 공부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운동을 하지 않으며 운동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스스로 돈을 벌지 않으며 자본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스스로 민중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민중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스스로에 대한 반성적인 인식을 게을리 하면서 다른 이들을 비판할 수 없다. 무엇에 대해 쉽게 실망하고 쉽게 기대를 지우고 쉽게 이야기하기 전에, 스스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고 선택해야한다. 어렵지 않은, 쉬운 말이지만 막상 그렇게 쉽지 않은 문제이기도 하다..</description>
			<category>잡담</category>
			<author>(프리스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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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1 Dec 2009 14:44:1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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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title>
			<link>http://www.eesoul.net/tc/freesty/entry/XFile-1</link>
			<description>&lt;BR&gt;&amp;nbsp;요새 내 영어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자가검증하게 될 일들이 많았다. 토익 토플 성적은 제쳐두더라도, 적어도 세계시민으로 국제적 연대에 참여하려면 일단 의사소통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다른 무언가를 열심히 공부한 적도 없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lt;BR&gt;&lt;BR&gt;&amp;nbsp;ㅈ파도 &#039;일을 내려면&#039; 어쨌든 자기계발에 힘써야 한다는, 적어도 자기계발적 주체들 이상으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오늘 인트라넷에서 우연히 순수이성비판 영문판 파일을 구했는데, 몇가지 생소한 단어들을 제외하면 오히려 국문판보다도 깔끔하게 읽을 수 있지 않나 싶다. 특히 국문판에서는 도저히 일상에서 쓰이지 않을 것 같은 몇몇 개념들이 영어로는 오히려 체감되는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영단어에 약하다. 영문법도 모르고.. 일단 영어 부터 시작해야 겠다.</description>
			<category>전체</category>
			<author>(프리스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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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04 Dec 2009 19:40:2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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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책마을 史 작업을 제안합니다.</title>
			<link>http://www.eesoul.net/tc/freesty/entry/%EC%B1%85%EB%A7%88%EC%9D%84-%E5%8F%B2-%EC%9E%91%EC%97%85%EC%9D%84-%EC%A0%9C%EC%95%88%ED%95%A9%EB%8B%88%EB%8B%A4-1</link>
			<description>&lt;SPAN id=textold&gt;&amp;nbsp;전 이제 100일 남았습니다. 떠나보낸 분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전&amp;nbsp;아직 떠날 날이 좀&amp;nbsp;남았군요. 휴. 요새 남은 기간 동안 뭘&amp;nbsp;해야 할까, 라고 생각하다가 떠올리게 된&amp;nbsp;것이, 어떻게든 책마을을 내&amp;nbsp;식으로 떠나보내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였습니다. 08년 8월 부터 09년 11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제&amp;nbsp;군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책마을이 차지했죠. 앞으로 제&amp;nbsp;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될&amp;nbsp;때면, 항상 책마을이라는 이름을 함께 떠올리게 될&amp;nbsp;것 같습니다. 이&amp;nbsp;것은 비단 저&amp;nbsp;뿐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이솔넷이건, 시즌 2건 잊지 않고 찾아오는 여러분들 역시 언젠가 제가 이야기했던 대로, 훗날 스스로를 한&amp;nbsp;권의 책으로 반추할 때, 젊은 날의 한&amp;nbsp;챕터에 &#039;책마을&#039;이라는 페이지를 빼놓을 수&amp;nbsp;없을 겝니다.&amp;nbsp; &lt;BR&gt;&lt;BR&gt;&amp;nbsp;이미 이야기가 나왔듯이, 안쪽 책마을, 그러니까 우리 대부분이 기억하는 근지대 책마을은 이제 없어졌습니다.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긴 해야겠지만, 그것이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모두 알고 계시겠죠. 흐흐.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곳을 찾아나가려는 모색이 물론 중요하겠습니다만, 저는 일단 우리가 떠나보낸 책마을을 어떤 식으로든지 &#039;애도&#039;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amp;nbsp;&#039;애도&#039;는 안쪽 책마을 뿐&amp;nbsp;아니라, 바깥에 있는 여러분들과도 함께 하고 싶은 것이구요.&amp;nbsp; &lt;BR&gt;&lt;BR&gt;&amp;nbsp;그 애도의 방법에 대해 고민을 좀&amp;nbsp;해봤습니다만,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quot;책마을史를 만들자&quot;라는 것이었습니다. 책마을은 적어도 06년 이전부터 계속 되었던 커뮤니티지만, 특성 상&amp;nbsp;바깥 세상에서는 널리 회자되지 못하고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커뮤니티로 남게 되었죠. 그러나 제&amp;nbsp;생각에는 인트라넷 뿐&amp;nbsp;아니라 인터넷 어디를 찾아보더라도, 이&amp;nbsp;나이 또래의 젊은이들만으로 구성되어, 이&amp;nbsp;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뭔가 이야기하려고 날뛰었던 공간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책마을을, 책마을을 거쳐간 수천명의 사람들의 삶을 정리해 보는 작업. 그&amp;nbsp;것은 글이 되어도 좋고, 영상이 되어도 좋고, 모임이 되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구요. 짧지 않은 기간을 버텼던 책마을을, 그&amp;nbsp;시작부터 지금까지를 기록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lt;BR&gt;&lt;BR&gt;&lt;BR&gt;&amp;nbsp;현재 고민하고 있는 몇&amp;nbsp;가지 방향은 대략 이렇습니다. &lt;BR&gt;&lt;BR&gt;1. 책마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하나의 통사를 만들어 본다 :&amp;nbsp;책마을의 시작을 기억하는 사람들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의 증언을 모아서 탄생과 변화 과정을 정리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의 기준으로 어떤 시기를 구분하여, 각&amp;nbsp;시기의 성격과 대표적인 논의들, 책마을의 에피소드들을 연결해보려고 합니다. &lt;BR&gt;&lt;BR&gt;&amp;nbsp;2. 몇&amp;nbsp;가지 주제를 정해서 그&amp;nbsp;주제에 대한 책마을 구성원들의 글을 묶어보려고 합니다. 특히 책마을에서 사병으로 복무하는, 복무했던 젊은이들의 일반적인 고민들을 주제로 글을 모아보려고 합니다. &lt;BR&gt;&lt;BR&gt;&lt;BR&gt;&amp;nbsp;3. 책마을은 나에게 무엇이었나, 라는 주제로 책마을과의 만남, 책마을에서의 삶, 책마을 이후의 삶에 대해서 글을 모아볼 생각입니다. &lt;BR&gt;&lt;BR&gt;&lt;BR&gt;&amp;nbsp;4. 그리고, 시기를 정하여 언젠가 연도를 초월해서 모임을 한번 가졌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lt;BR&gt;&lt;BR&gt;&lt;BR&gt;&amp;nbsp;이러한 작업은 &#039;우리 세대 책마을&#039; 뿐&amp;nbsp;아니라, 명예의 전당에나 남아있는 &#039;이전 세대&#039; 분들과도 함께해야할 작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러한 공동 작업을 통해서, 책마을을 단지 몇몇이 공유하는 기억이 아닌, 이제까지 책마을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하나의 기표로 재정의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amp;nbsp; &lt;BR&gt;&lt;BR&gt;&amp;nbsp;그래서, 여러분께 제안합니다. 함께 만들어나가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의 책마을史를.&amp;nbsp; &lt;/SPAN&gt;</description>
			<category>잡담</category>
			<author>(프리스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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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www.eesoul.net/tc/freesty/entry/%EC%B1%85%EB%A7%88%EC%9D%84-%E5%8F%B2-%EC%9E%91%EC%97%85%EC%9D%84-%EC%A0%9C%EC%95%88%ED%95%A9%EB%8B%88%EB%8B%A4-1#entry58comment</comments>
			<pubDate>Wed, 25 Nov 2009 19:37:28 +0900</pubDate>
		</item>
		<item>
			<title>..</title>
			<link>http://www.eesoul.net/tc/freesty/entry/XFile</link>
			<description>&lt;P&gt;남은 기간 동안 뭘 해야 할까, 라고 생각하다가 떠오른 것이, 어떻게든 책마을을 내 식으로 떠나보내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였다. 08년 8월 부터 09년 11월까지, 1년 3개월 동안 내 군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책마을이 차지했다. 물론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것들, 쓰고 싶었던 것들을 책마을에서 제대로 풀어낸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앞으로 평생 동안 다른 이들 처럼 군 생활을 떠올릴 때 마다 - 혹 내 젊은 날을 떠올릴 때 마다 - 책마을 역시 잊을 수 없을게다. 그런 책마을을, 폭파 때문이건 전역 때문이건 어쨌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lt;/P&gt;
&lt;br /&gt;
&lt;P&gt;몇 가지 방법을 생각해보았는데,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린게 책마을史를 만들자, 라는 것이다. 책마을은 적어도 06년 이전부터 계속 되었던 커뮤니티지만, 특성 상 인트라넷 바깥 세상에서는 널리 회자되지 못하고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커뮤니티로 남았다. 그러나 인트라넷 뿐 아니라 인터넷 어디를 찾아보더라도, 이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이 이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뭔가 이야기하려고 날뛰었던 공간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 책마을을, 책마을을 거쳐간 수천명의 사람들의 삶을 정리해 보는 작업. 그 것은 글이 되어도 좋고, 영상이 되어도 좋고, 모임이 되어도 좋을 것이다. 짧지 않은 기간을 버텼던 책마을을,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를 기록해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lt;/P&gt;</description>
			<category>전체</category>
			<author>(프리스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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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24 Nov 2009 22:57:17 +0900</pubDate>
		</item>
		<item>
			<title>잡담.</title>
			<link>http://www.eesoul.net/tc/freesty/entry/%EC%9E%A1%EB%8B%B4</link>
			<description>1. 꽤 많은 사람들이 이 블로그에 댓글이 안달린다고 한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lt;BR&gt;&lt;BR&gt;2. 공동생활전선을 위해 여기저기 부동산 가격을 알아보고 있는데, 과연 사람들이 내 집 내 집 하는게 이유가 있는듯. 서울은 집값이 너무X100 비싸다.&lt;BR&gt;&lt;BR&gt;3. 다음 학기 시간표를 대략 짰다. 엄청나게 기대되는 강의가 절반, 상당히 기대 되는 강의가 절반. 그러나 복학하고 바로 그 다음 학기가 그렇게 힘들다는데 제대로 할 수 있을지는...&lt;BR&gt;&lt;BR&gt;4. 이제 100일 가량 남았다. 옛날 책마을 병장들 보면 금방금방 제대하던데.. 왜 난 이렇게 시간이 안가는지 모르겠음.&lt;BR&gt;&lt;BR&gt;혹 그런 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 꼭 연락을 해야하지만, 여기에 댓글이 안달려서 연락을 못하고 있어요~ 라는 사람이 있다면 &lt;A href=&quot;http://freesty811.egloos.com&quot;&gt;http://freesty811.egloos.com&lt;/A&gt; &amp;lt;- 여기 가장 첫 포스트에 댓글을 다시면 됩니당.</description>
			<category>전체</category>
			<author>(프리스티)</author>
			<guid>http://www.eesoul.net/tc/freesty/55</guid>
			<comments>http://www.eesoul.net/tc/freesty/entry/%EC%9E%A1%EB%8B%B4#entry55comment</comments>
			<pubDate>Mon, 23 Nov 2009 22:08:49 +0900</pubDate>
		</item>
		<item>
			<title>[번역] 붕괴의 20년 - 슬라보예 지젝</title>
			<link>http://www.eesoul.net/tc/freesty/entry/%EB%B2%88%EC%97%AD-%EB%B6%95%EA%B4%B4%EC%9D%98-20%EB%85%84-%EC%8A%AC%EB%9D%BC%EB%B3%B4%EC%98%88-%EC%A7%80%EC%A0%9D-1</link>
			<description>&lt;P&gt;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슬라보예 지젝이 뉴욕 타임스에 쓴 글을 번역해 올려봅니다. 다들 알다시피 제 영어실력은 말할 필요 없이 처참하니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lt;/P&gt;
&lt;P&gt;----------------------------------------------------------------------------------------------------------------------------------------------------&lt;/P&gt;
&lt;P&gt;오늘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20주년 되는 날이다. 그 성찰의 시간 동안에, 그날 일어났던 사건들의 기적적인 힘을 강조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amp;nbsp; : 꿈은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 처럼 보였다, 공산체제는 카드로 쌓은 집처럼 무너졌고, 세계는 그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상상 할 수 없던 방향으로 갑작스레 변화했다. 폴란드에서 그 누가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자유선거가 실시될 수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lt;/P&gt;
&lt;P&gt;&amp;nbsp;그러나 벨벳 혁명(1989년 체코 시민 혁명)의 숭고한 안개는 새로운 민주주의-자본주의의 현실에 의하여 헤쳐 없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민주자본주의가 스스로 선언했던 것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실망과 함께, &#039;좋았던 옛&#039; 공산시절에 대한 향수와, 우파 민족주의 포퓰리즘, 그리고 때늦은 반공주의적 편집증이 부활하기 시작했다.&lt;/P&gt;
&lt;P&gt;&amp;nbsp;처음 두 반응은 이해하기 쉬운 것이다. 단지 십년 전에 &quot;빨갱이보다 차라리 죽음을 달라!&quot;라고 외쳤던 바로 그 우파들이 이제는 &quot;햄버거나 씹는 것보다 빨갱이 시절이 낫다&quot;라고 우물거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는 심각하게 받아들일 문제는 아니다. 그들은 회색 사회주의의 과거로 돌아가자는 현재의 소망을 표현하는 것과 달리, 이러한 향수는 단지 과거를 서서히 지워나가는 &#039;애도&#039;의 형태에 가깝다. 그리고 우파 포퓰리즘의 문제는, 단지 동유럽에 특정한 일이 아니라 세계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나라들이 겪고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lt;/P&gt;
&lt;P&gt;&amp;nbsp; 흥미로운 것은, 현재 헝가리에서 부터 슬로베니아까지 다시 유행하고 있는 반공주의의 물결이다. 2006년 가을, 사회주의 집권 정당에 대한 대규모의 저항들은 헝가리를 몇 주 동안 마비시켰다. 반정부파들은 국가경제의 위기가 공산당의 후신들에 의한 집권과 연결 시켰다. 헝가리 정부는 민주적 선거에 의해 구성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부의 정당성을 거부했다. 그리고 경찰들이 시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들어간 것은, 마치 1956년 반공산주의 봉기 때 소련군이 이를 분쇄했던 것과 비교되었다.&lt;/P&gt;
&lt;P&gt;&amp;nbsp;이 새로운 반공주의 공포는 심지어 상징물조차도 뒤쫓고 있다. 2008년 6월, 리투아니아는 (소련국가를 연주하는 것은 물론이고) 망치와 낫처럼 공산주의적 이미지를 나타내는 공공 전시를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2009년 4월, 폴란드 정부는 공산주의적 서적, 의류, 그리고 다른 물품들을 포함한 전체주의적 프로파간다 전반에 대한 금지를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 심지어 누군가 체게바라 티셔츠를 입었다고 체포될 수 있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슬로베니아에서 포퓰리즘적 우파의 좌파에 대한 주된 비난이 현 좌파가 구 공산체제와 &#039;연속적인 권력&#039;을 가졌다는 것임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렇게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심지어 게이의 권리에 대한 옹호나 합법적 낙태에 대한 옹호들이 나라를 타락시키는 어두운 공산주의 음모라는&amp;nbsp; (폴란드와 슬로베니아에서 제기되는) 불합리한 주장들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제들과 도전들은 낡은 투쟁의 되풀이로 격하되었다.&lt;/P&gt;
&lt;P&gt;&amp;nbsp;이 같은 반공주의의 부활은 어디서부터 힘을 받게 된 것일까? 왜 공산주의 시절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많은 젊은이들의 나라에서 반공주의라는 오래된 유령이 부활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새로운 반공주의가 &quot; 자본주의가 정말로 사회주의보다 좋은 것이라면, 왜 우리는 아직도 비참하게 살고 있는 것이지?&quot; 라는 문제에 대해 간단한 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진짜 자본주의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고 믿고 있다 : &quot;우리는 아직 진짜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했어, 우리는 단지 민주주의를 위장한 가면에 속고 있을 뿐이야, 과거 공산주의적 분파들이 새롭게 주인과 관리자로 변신해서 여전히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고, 아무 것도 실제로는 변하지 않았어.. 우리는 또 다른 숙청이 필요해, 혁명이 다시 일어나야 해...&quot;&lt;BR&gt;&amp;nbsp;&lt;BR&gt;&amp;nbsp;그러나 이러한 때늦은 반공주의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경고하는 그들 사회의 문제들이 사실 전통적인 좌파들이 남용하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이미지 - 소수 부유층의 통치가 형식적 민주주의에 의해 가려지는 사회 - 와 기괴할 정도로 유사하다는 점이다. 다르게 말해서, 새롭게 탄생한 반공주의자들은 그들이 비난하는 지금의 &#039;왜곡된 가짜 자본주의&#039;가 사실 &#039;자본주의 그 자체&#039;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lt;BR&gt;&amp;nbsp;&lt;BR&gt;&amp;nbsp;누군가는 공산 체제가 붕괴한 후, 환상에서 깨어난 구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에게 반대하던 자유주의 운동가들 보다 더욱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에 재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반공의 투사들이 계속해서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해 그들의 꿈을 성실히 추구하고 있는 동안, 구 공산주의자들은 거침없이 더러운 속임수와 위법 행위를 동원하여 스스로를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자로 변신시킨 것이라고 말이다.&lt;BR&gt;&amp;nbsp;&lt;BR&gt;&amp;nbsp;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는 동안에 자본주의화가 허용되었던 나라들에 의해 더 나아간 왜곡이 더해진다. 그들은 서구 자유자본주의자 본인들보다 더욱 더 자본주의자처럼 보인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물리쳤지만, 그 매수대금으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영역에서 자본주의를 이겨낼 수 있었다.&lt;BR&gt;&amp;nbsp;&lt;BR&gt;&amp;nbsp;이것은 오늘날 중국이 왜 이토록 동요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amp;nbsp; : 자본주의는 항상 민주주의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이 자본주의와 직면했을 대, 많은 분석가들은 중국이 정치적 민주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lt;BR&gt;&amp;nbsp;&lt;BR&gt;&amp;nbsp;그러나 중국의 권위주의적 자본주의가 오히려 우리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보다 더욱 효율적이고, 더욱 이익을 내는 체제가 된다면 어떨까? 만약 민주주의가 더이상 경제 성장에 필요한, 자연스러운 동반물이 아니라면, 오히려 방해물이라면 어찌하겠는가?&lt;BR&gt;&amp;nbsp;&lt;BR&gt;&amp;nbsp;만약 그렇다면, 구 공산권 국가들의 실망은 자본주의의 진짜 이미지를 가지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039;미숙한&#039; 기대의 상징으로 기각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lt;/P&gt;
&lt;P&gt;&amp;nbsp;사실 동구권의 공산체제에 대해 반대했던 사람들 대다수는 자본주의를 요구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국가 통제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그들의 원하는대로 함께 어울리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유를 원했던 것이다. 그들이 원한 삶은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었다 : 야만적 이데올로기적 교화에서 자유로운, 냉소적인 위선들을 극복하는 삶.&lt;BR&gt;&amp;nbsp;&lt;BR&gt;&amp;nbsp;많은 평자들이 보았을 때, 반대자들을 이끌었던 이상은 그들을 지배했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자체에서 큰 부분을 가져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quot;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quot; 정도로 불렸던 것을 열망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태도는 두번째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lt;BR&gt;&amp;nbsp;&lt;BR&gt;&amp;nbsp;우리는 그것을 소련의 기술자였던 빅터 크라브첸코의 삶과 죽음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1944년, 워싱턴으로 무역 임무를 맡았을 때 탈출하여 &amp;lt;나는 자유를 택했다&amp;gt;라는 베스트셀러 자서전을 펴냈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공포를 묘사한 그의 자전적 기록은 1930년대 초반, 그때까지만 해도 체제 신봉자였던 크라브첸코가 집단농장화가 강행되는 것을 도왔을 때, 우크라이나를 휩쓸던 기아사태에 대한 묘사를 포함하고 있다.&lt;BR&gt;&amp;nbsp;&lt;BR&gt;&amp;nbsp;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1949년 말의 크라브첸코이다. 그 해, 크라브첸코는 프랑스 공산당 주간지 &#039;Les Lettres Francaises&#039;가 그를 알콜중독자에다가 아내 구타자로, 또 그의 회고록이 미국 스파이로 일하는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고 묘사했다는 이유로 그 주간지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파리 법정에서, 소련 장성들과 러시아 농부들이 그 증인으로 채택되어 크라브첸코의 저작이 진실된 것인지 토론했다. 그리고 재판은 그의 개인적인 문제에서 스탈린 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고발까지 확대되었다.&lt;BR&gt;&amp;nbsp;&lt;BR&gt;&amp;nbsp;그러나 그는 법정에서 승리한 직후, 아직 크라브첸코가 냉전시대의 영웅으로 모든 사람에게 갈채를 받고 있을 때, 그는 용감하게도 조셉 맥카시의 마녀 사냥에 열렬히 반대하며 외쳤다.&amp;nbsp; &lt;/P&gt;
&lt;P&gt;&amp;nbsp;&quot;나는 공산주의자들과 그 조직에 대한 투쟁에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이 쓰는 수법과 형식에 의지할 수 없다고 진심으로 믿는다.&quot; 그는 미국인들에게 경고했다 : 이런 방식으로 스탈린주의와 싸우는 것은 스탈린주의를 닮아가는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다.&lt;BR&gt;&amp;nbsp;&lt;BR&gt;&amp;nbsp;크라브첸코는 또한 서구의 불평등 문제에 대해 더욱 더 괴로워하게 되었고, 그는 &quot;나는 자유를 선택했다.&quot;의 후편을 쓰면서 의미심장한 제목을 붙이게 된다. &quot;나는 정의를 선택했다.&quot; 그는 덜 착취적인 집단농장 형태를 찾기 위해 헌신했지만, 그 것은 가난한 농부들을 조직하기 위해 그의 전 재산을 탕진했던 볼리비아에서 끝나고 말았다. 그 실패로 인하여, 그는 사생활에서도 움츠리게 되었고, 그리고 1966년에 뉴욕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자살하게 되었다.&lt;BR&gt;&amp;nbsp;&lt;BR&gt;&amp;nbsp;우리는 이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20세기 공산주의에 의해 기만 당하고 21세기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끼는 (상태에서), 우리는 새로운 크라브첸코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 그리고 단지 그들이 보다 행복한 결과를 낼 수 있도록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정의를 찾는 과정에서, 그들은 무에서 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발명해야 한다. 그들은 위험한 유토피아주의자들로 비난 받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이야 말로 유토피아적 꿈 - 나머지 사람들을 자신의 지배 하에 붙잡아 두는 유토피아적 꿈으로 부터 깨어난 유일한 사람들일 것이다.&lt;BR&gt;&lt;BR&gt;&lt;BR&gt;20 Years of Collapse &lt;/NYT_HEADLINE&gt;&lt;NYT_BYLINE version=&quot;1.0&quot; type=&quot; &quot;&gt;&lt;/P&gt;
&lt;DIV class=byline&gt;By SLAVOJ ZIZEK&lt;/DIV&gt;
&lt;DIV class=byline&gt;&amp;nbsp;&lt;/DIV&gt;&lt;/NYT_BYLINE&gt;&lt;NYT_TEXT&gt;
&lt;DIV id=articleBody&gt;
&lt;P&gt;TODAY is the 20th anniversary of the fall of the Berlin Wall. During this time of reflection, it is common to emphasize the miraculous nature of the events that began that day: a dream seemed to come true, the Communist regimes collapsed like a house of cards, and the world suddenly changed in ways that had been inconceivable only a few months earlier. Who in Poland could ever have imagined free elections with Lech Walesa as president? &lt;/P&gt;
&lt;br /&gt;
&lt;P&gt;However, when the sublime mist of the velvet revolutions was dispelled by the new democratic-capitalist reality, people reacted with an unavoidable disappointment that manifested itself, in turn, as nostalgia for the “good old” Communist times; as rightist, nationalist populism; and as renewed, belated anti-Communist paranoia. &lt;/P&gt;
&lt;br /&gt;
&lt;P&gt;The first two reactions are easy to comprehend. The same rightists who decades ago were shouting, “Better dead than red!” are now often heard mumbling, “Better red than eating hamburgers.” But the Communist nostalgia should not be taken too seriously: far from expressing an actual wish to return to the gray Socialist reality, it is more a form of mourning, of gently getting rid of the past. As for the rise of the rightist populism, it is not an Eastern European specialty, but a common feature of all countries caught in the vortex of globalization. &lt;/P&gt;
&lt;br /&gt;
&lt;P&gt;Much more interesting is the recent resurgence of anti-Communism from Hungary to Slovenia. During the autumn of 2006, large protests against the ruling Socialist Party paralyzed Hungary for weeks. Protesters linked the country’s economic crisis to its rule by successors of the Communist party. They denied the very legitimacy of the government, although it came to power through democratic elections. When the police went in to restore civil order, comparisons were drawn with the Soviet Army crushing the 1956 anti-Communist rebellion. &lt;/P&gt;
&lt;br /&gt;
&lt;P&gt;This new anti-Communist scare even goes after symbols. In June 2008, Lithuania passed a law prohibiting the public display of Communist images like the hammer and sickle, as well as the playing of the Soviet anthem. In April 2009, the Polish government proposed expanding a ban on totalitarian propaganda to include Communist books, clothing and other items: one could even be arrested for wearing a Che Guevara T-shirt. &lt;/P&gt;
&lt;br /&gt;
&lt;P&gt;No wonder that, in Slovenia, the main reproach of the populist right to the left is that it is the “force of continuity” with the old Communist regime. In such a suffocating atmosphere, new problems and challenges are reduced to the repetition of old struggles, up to the absurd claim (which sometimes arises in Poland and in Slovenia) that the advocacy of gay rights and legal abortion is part of a dark Communist plot to demoralize the nation.&lt;/P&gt;
&lt;br /&gt;
&lt;P&gt;Where does this resurrection of anti-Communism draw its strength from? Why were the old ghosts resuscitated in nations where many young people don’t even remember the Communist times? The new anti-Communism provides a simple answer to the question: “If capitalism is really so much better than Socialism, why are our lives still miserable?” &lt;/P&gt;
&lt;br /&gt;
&lt;P&gt;It is because, many believe, we are not really in capitalism: we do not yet have true democracy but only its deceiving mask, the same dark forces still pull the threads of power, a narrow sect of former Communists disguised as new owners and managers — nothing’s really changed, so we need another purge, the revolution has to be repeated ...&lt;/P&gt;
&lt;br /&gt;
&lt;P&gt;What these belated anti-Communists fail to realize is that the image they provide of their society comes uncannily close to the most abused traditional leftist image of capitalism: a society in which formal democracy merely conceals the reign of a wealthy minority. In other words, the newly born anti-Communists don’t get that what they are denouncing as perverted pseudo-capitalism simply &lt;SPAN class=italic&gt;is&lt;/SPAN&gt; capitalism. &lt;/P&gt;
&lt;br /&gt;
&lt;P&gt;One can also argue that, when the Communist regimes collapsed, the disillusioned former Communists were effectively better suited to run the new capitalist economy than the populist dissidents. While the heroes of the anti-Communist protests continued to dwell in their dreams of a new society of justice, honesty and solidarity, the former Communists were able to ruthlessly accommodate themselves to the new capitalist rules and the new cruel world of market efficiency, inclusive of all the new and old dirty tricks and corruption. &lt;/P&gt;
&lt;br /&gt;
&lt;P&gt;A further twist is added by those countries in which Communists allowed the explosion of capitalism, while retaining political power: they seem to be more capitalist than the Western liberal capitalists themselves. In a crazy double reversal, capitalism won over Communism, but the price paid for this victory is that Communists are now beating capitalism in its own terrain. &lt;/P&gt;
&lt;br /&gt;
&lt;P&gt;This is why today’s China is so unsettling: capitalism has always seemed inextricably linked to democracy, and faced with the explosion of capitalism in the People’s Republic, many analysts still assume that political democracy will inevitably assert itself. &lt;/P&gt;
&lt;br /&gt;
&lt;P&gt;But what if this strain of authoritarian capitalism proves itself to be more efficient, more profitable, than our liberal capitalism? What if democracy is no longer the necessary and natural accompaniment of economic development, but its impediment?&lt;/P&gt;
&lt;br /&gt;
&lt;P&gt;If this is the case, then perhaps the disappointment at capitalism in the post-Communist countries should not be dismissed as a simple sign of the “immature” expectations of the people who didn’t possess a realistic image of capitalism. &lt;/P&gt;
&lt;br /&gt;
&lt;P&gt;When people protested Communist regimes in Eastern Europe, the large majority of them did not ask for capitalism. They wanted the freedom to live their lives outside state control, to come together and talk as they pleased; they wanted a life of simplicity and sincerity, liberated from the primitive ideological indoctrination and the prevailing cynical hypocrisy. &lt;/P&gt;
&lt;br /&gt;
&lt;P&gt;As many commentators observed, the ideals that led the protesters were to a large extent taken from the ruling Socialist ideology itself — people aspired to something that can most appropriately be designated as “Socialism with a human face.” Perhaps this attitude deserves a second chance. &lt;/P&gt;
&lt;br /&gt;
&lt;P&gt;This brings to mind the life and death of Victor Kravchenko, the Soviet engineer who, in 1944, defected during a trade mission to Washington and then wrote a best-selling memoir, “I Chose Freedom.” His first-person report on the horrors of Stalinism included a detailed account of the mass hunger in early-1930s Ukraine, where Kravchenko — then still a true believer in the system — helped enforce collectivization. &lt;/P&gt;
&lt;br /&gt;
&lt;P&gt;What most people know about Kravchenko ends in 1949. That year, he sued Les Lettres Françaises for libel after the French Communist weekly claimed that he was a drunk and a wife-beater and his memoir was the propaganda work of American spies. In the Paris courtroom, Soviet generals and Russian peasants took the witness stand to debate the truth of Kravchenko’s writings, and the trial grew from a personal suit to a spectacular indictment of the whole Stalinist system. &lt;/P&gt;
&lt;br /&gt;
&lt;P&gt;But immediately after his victory in the case, when Kravchenko was still being hailed all around the world as a cold war hero, he had the courage to speak out passionately against Joseph McCarthy’s witch hunts. “I believe profoundly,” he wrote, “that in the struggle against Communists and their organizations ... we cannot and should not resort to the methods and forms employed by the Communists.” His warning to Americans: to fight Stalinism in such a way was to court the danger of starting to resemble their opponent. &lt;/P&gt;
&lt;br /&gt;
&lt;P&gt;Kravchenko also became more and more obsessed with the inequalities of the Western world, and wrote a sequel to “I Chose Freedom” that was titled, significantly, “I Chose Justice.” He devoted himself to finding less exploitative forms of collectivization and wound up in Bolivia, where he squandered all his money trying to organize poor farmers. Crushed by this failure, he withdrew into private life and shot himself in 1966 at his home in New York.&lt;/P&gt;
&lt;br /&gt;
&lt;P&gt;How did we come to this? Deceived by 20th-century Communism and disillusioned with 21st-century capitalism, we can only hope for new Kravchenkos — and that they come to happier ends. On the search for justice, they will have to start from scratch. They will have to invent their own ideologies. They will be denounced as dangerous utopians, but they alone will have awakened from the utopian dream that holds the rest of us under its sway.&lt;/P&gt;
&lt;br /&gt;&lt;NYT_AUTHOR_ID&gt;
&lt;DIV id=authorId&gt;
&lt;P&gt;Slavoj Zizek, the international director of the Birkbeck Institute for the Humanities in London, is the author, most recently, of “First as Tragedy, Then as Farce.” &lt;BR&gt;&lt;BR&gt;&lt;/P&gt;&lt;/DIV&gt;&lt;/DIV&gt;</description>
			<category>전체</category>
			<category>동유럽</category>
			<category>베를린 장벽</category>
			<category>지젝</category>
			<author>(프리스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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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6 Nov 2009 19:19:3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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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추석맞이 근황</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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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BR&gt;&amp;nbsp;안 쪽에서 &#039;공동생활전선&#039;이라는 기획을 꾸미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몇몇이 모여서 &#039;함께 생활하면서 &#039;공부도&#039;하고 &#039;활동&#039;도 하자, 라는 기획입니다. 사실 저 스스로 부터 말은 번드르해도 일상적인 삶 속에서 자신의 의식을 배반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나, 라는 자괴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그렇다면 &#039;뭔가 해야한다&#039;고 느끼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가 서로를 규율하면서 &#039;인간 개조&#039;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함께 집약적으로 / 혹 전략적으로 공부를 하며 &#039;대의&#039;를 규명하고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실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lt;BR&gt;&lt;BR&gt;&amp;nbsp;일단 대략적인 전제는 다음과 같습니다.&lt;BR&gt;&lt;BR&gt;&amp;nbsp;&#039;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경제적 자율성을 확보하기&#039; - 이는 오늘 날 우리 세대가 미래에 대한 까닭모를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서 시작하여 결국 &#039;자발적 가난&#039;이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출발점이 아니겠느냐, 라는 이유로 채택된 것입니다. 제가 벌어 그 한도 내에서 소비하면서 얼마만큼 생활이라는 것을 유지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실험이라 할 수 있겠죠. &lt;BR&gt;&lt;BR&gt;&#039;공동 자취가 아닌 공동 생활&#039; - 그냥 주거지를 공유한다는 의미에서 공동생활이 아니라, 생활마저도 공유하면서 서로의 일상에 긴장을 주는 것이 목표입니다. 물론 완전무결한 도덕성을 요구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윤리적인 삶을 사는데 있어서 다른 이의 눈길이란 부담스럽지만 그 만큼 효과적인 것이죠.&lt;BR&gt;&lt;BR&gt;&#039;대의를 규명하기&#039; - 결국 &#039;공부&#039;는 피해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부는 &#039;독고다이&#039;로 하기도 어려운 것이구요.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아니 아예 일상이 공부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고 싶구요.&lt;BR&gt;&lt;BR&gt;&amp;nbsp;저는 이 공동체를 통해서 &#039;뭔가 해보려는&#039; 생각 보다는, 이 공동체를 통해 저를 포함한 다른 이들이 나중에 &#039;뭔가 할 수 있도록&#039; 훈련을 쌓아나가는 계기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20대 초반을 통틀어 얻게 된 모종의 깨달음이 과연 유효한 것일까, 라는 실험의 의미도 있구요. 진행이 되는대로 이솔넷에서도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description>
			<category>잡담</category>
			<author>(프리스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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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04 Oct 2009 15:42:2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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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박재범 단상</title>
			<link>http://www.eesoul.net/tc/freesty/entry/%EB%B0%95%EC%9E%AC%EB%B2%94-%EB%8B%A8%EC%83%81</link>
			<description>&lt;P&gt;1. 외국인 노동자는 돌아가라! &lt;/P&gt;
&lt;P&gt;- 박재범에 대한 비난 여론 중 대표적인 멘트가 바로 &#039;외국인 노동자는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039;라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쉽게 알아 챌 수 있듯이 일단&amp;nbsp; &#039;외국인 노동자&#039; 전반에 대한 혐오감이 섞인 말인데, 그 대상이 박재범이라는게 재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꽤나 양식 있는 척 하는 커뮤니티나 블로그들에서도 이런 반응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어서 꽤 놀라웠는데, 사실 이 것은 다음과 같은 속마음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싶다.&lt;/P&gt;
&lt;P&gt;&amp;nbsp;&quot;한국 와서 돈 벌어서 자기네 나라로 보내고(&#039;국부&#039;를 자신의 이익과 동일시 하는 심리),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은 싫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약자 위치에 놓여있는 동남아시아 이주 노동자들을 대놓고 욕하기엔 남들 보기에 껄끄러웠기 때문에 이런 혐오증을 드러내지 못했는데 마침 마음 놓고 욕해도 되는 박재범(연예인이라는 사회적 &#039;강자&#039;, 쉴드 쳐주는 &#039;빠순이&#039;와 JYP라는 &#039;빽&#039;을 가졌다, 게다가 불량한 과거가 있고 나라 욕했다는 개념 없는 놈)이 나타났으니 억눌린 혐오감을 표출해보자!&quot;&lt;/P&gt;
&lt;P&gt;&amp;nbsp;이런 속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닌게(물론 당연히 동조는 할 수 없지만) 이러한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 사회적 불만이 팽배한 젊은 세대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독일 네오나치나 러시아 스킨헤드 등의 사례를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다. 다만 그 대상이 박재범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희극이면서, 또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박재범을 욕하는 사람들은 &#039;외국인 노동자&#039;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박재범이 실제로는 &#039;외국인 노동자&#039;처럼 비하와 무시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적 강자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사실 박재범은 정말로 말그대로 &#039;외국인 노동자&#039;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인기 전성기의 아이돌 그룹 투피엠의 리더인 박재범이 &#039;외국인 노동자&#039;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하나 하나 따져보겠다. 왜 박재범이 외국인 노동자인지를.&lt;/P&gt;
&lt;P&gt;&lt;BR&gt;&amp;nbsp;이번 일이 터진 바로 그 주, 박재범은 &amp;lt;상상 플러스&amp;gt;에서 아직도 돈 한 푼 시애틀로 보내지 못했다고, 그러니까 돈 좀 벌어야한다고 우스갯소리처럼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 것은 아마 &#039;우스갯 소리&#039;만은 아닐 것이다. 박재범은 3~4년 간의 연습생 생활을 거쳤고, 이제 겨우 데뷔 1년이 넘은 아이돌이다. &#039;JYP연습생&#039;이라는 것은 뭔가 &#039;있어 보이는&#039; 타이틀이지만, 실은 언제 데뷔할지 모르는 시간을 보내며 연습에 매진해야하는 신분이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039;전속 계약&#039;을 맺지 않은 신분인 기획사 연습생은 개인 활동을 통한 실적이 있지 않고서야 기획사로부터 돈 한 푼 받지 못하는, 경제적으로 완전히 빈곤한 상태라는 것이다. 박재범이 연습생 생활을 어떻게 보냈는지 팬이 아닌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가족과 떨어진 이역만리 한국에서 거주 비용이나 생활비와 같은 것들을 자가 부담으로 버텨야했을 것이다. (비슷한 사정의 연습생이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알게 된 사실이다. 나는 적어도 숙소 정도는 기획사에서 제공해주는 줄 알았다!) 그런 고난의 시절을 보낸 후에야, 그는 아이돌 그룹 멤버로 데뷔할 수 있었고, 그 후에야 드디어 수입이 생기게 되었다.&lt;/P&gt;
&lt;P&gt;&amp;nbsp;그러나 데뷔를 했다고 해서, 또 빠른 시일 내에 인기 전성의 아이돌 그룹으로 성장했다고 해서 바로 돈이 굴러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이미 동방신기 사건의 사례를 통해 알려졌고, 또 아이돌 팬들이라면 자주 줏어들었듯이 이들의 생활비나 전속 스탭 고용비 등은 대부분 기획사가 아닌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부담해야한다. (기획사에서 수익 분배 시 이런 비용을 공제한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기획사 - 아이돌 간의 불합리한 수익 분배 구조가 가지는 문제도 있다. 행사를 한번 뛰면 수입을 반반으로 나눈다고 가정하면, 이를 아이돌 그룹 멤버 수에 맞추어 다시 나누어가진다. 동방신기 같은 경우 방송 출연료도 &#039;고정&#039; 코너가 아니라면 기획사가 거의 다 먹는 계약 조건이었는데, 투피엠이 어땠을지는 몰라도 국내 최고 그룹인 동방신기에 비해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는 못했을 것 같다. 어찌되었든 재범이 방송에서 이야기한대로, &quot;한 푼도 시애틀로 보내지 못했다&quot;라는 것은 아마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재범 뿐 아니라 전체 아이돌 그룹 멤버들에게 &#039;노동자&#039;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박재범은 일단 외국인 &#039;노동자&#039;인 것이다. 지금 재범의 상황은, 말하자면 몇 년간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도제로 일해서(연습생) 이제 겨우 장인으로 인정 받은 상황에서(데뷔) 1년 만에 길드(기획사)에서 쫓겨나 도시 밖으로 추방된(미국 행)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lt;/P&gt;
&lt;P&gt;&amp;nbsp;자, 외국인 노동자에서 &#039;노동자&#039;를 봤으니 이제 &#039;외국인&#039;을 볼 차례다. 많은 이들이 유승준 사건과 겹쳐 보고 있는데, 유승준과 박재범 모두 한국 내셔널리즘의 역린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 문제와 한국 비하라는 것을 건드렸고, 모두 교포 출신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공통점을 가진다. 네이션=스테이트는 &#039;민족(언어/문화/생활 공동체)&#039;이라는 내적 국경과 실체적 국가의 외적 국경이 일치되면서 성립된다. 따라서 생활권이나 문화도 크게 다르고, 국가의 외적 국경에 포괄되지 않는 &#039;교포&#039;(특히 2,3세들)들은 어찌 보면 이 &#039;네이션&#039;에서 배제된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039;우리 민족&#039;으로 불리는 한인 교포들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들은 어디까지나 &#039;성공한 사람(민족의 기상을 널리 떨친?)&#039;들에 한정된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039;교포&#039;들이 가지는 의미는 마치 &#039;멀리 떨어져, 존재만 알고 지내는 배다른 형제&#039;와 같은 것이 아닐까? 성공하면 우리 가족. 실패하면 남남. &lt;/P&gt;
&lt;P&gt;&amp;nbsp;연예계, 특히 아이돌 그룹은 다른 직업군에 비하여 유독 &#039;교포&#039; 출신 비율이 높은 직종이다. 알다시피 아이돌 산업은 그 초창기부터 해외파 멤버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039;해외파&#039;라는 이미지가 가지는 자유롭고 새로운 느낌이 주 타겟인 청소년들에게 먹혀들어갔기 때문인데,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1세대 아이돌 그룹의 영어 이름 쓰는 해외파 멤버들은 사실 &#039;교포&#039;라기 보다 외국물 몇년 먹은 한국 중상층 유학생(혹은 날라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면서 마치 데뷔할 때는 교포 출신 같은 이미지를 풍기면서 방송활동을 했던 것이다. (모 1세대 아이돌 그룹 리더이자, 요새 예능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모 군은, 사실 영어도 잘 못하지만 데뷔 초만 해도 해외파 느낌을 물씬 냈다..) 이러한 해외파 멤버 몇에,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거칠게 말해서) 가정 환경 좀 안좋고 학교 가는 대신 춤 추러 다니던 청소년들이 플러스 되서 이른바 1세대 아이돌 그룹이라는게 구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돌 시장이 점차 커지고 이런 직종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요새는 아이돌 그룹 멤버들도 보통 중산층 가정 출신에, 어릴적부터 정말 연예계에 가능성을 걸고 연습생부터 온 가족이 &#039;밀어주는&#039; 소년소녀들이 대부분이 되었다. (아이돌이 이른바 &#039;성공 코스&#039;의 하나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반면에, &#039;해외파&#039; 멤버들은 상대적으로 좀 &#039;못 사는&#039; 교포 출신으로 채워지게 되었다.&amp;nbsp; 아이돌 음악의 트렌드 같은 것이 예전보다 미국과 시차가 없어지게 되면서 &#039;외국물 먹은&#039; 애들이 아닌, 정말로 본토 댄스/팝 문화를 호흡했던 &#039;교포&#039; 멤버들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포 사회에서 좀 사는 집안에서 이역만리 한국까지 연예인 시키려고 쉽게 보내지는 않을 것이고, 결국 경제적으로 좀 어렵고, 어떤 &#039;야심&#039;을 가진 애들이 주로 한국까지 가서 연습생을 거쳐 데뷔하게 되는 것인데 박재범이 이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lt;/P&gt;
&lt;P&gt;&amp;nbsp;해외파를 자칭했지만 사실 해외파로 부르기엔 좀 민망했던 아이돌 1세대들은 한국 사회나 문화와 충돌할 일이 없었다. 이들은 단순히 대중들로부터 &#039;해외파&#039;라는 이미지의 소비 대상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 역시 얼마 안가서 희미해졌다.) 그러나 정말로 &#039;해외파&#039;인 교포 멤버들은 한국에서 오히려 어떤 문화적 갈등을 빚게 되는 일이 많다. 교포 멤버들의 돌출 발언이나 (주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비춰지는) 감정 기복 같은 것이 파문을 빚는 일이 있는데, 박재범에 대한 이번 여론은 이러한 갈등이 표면화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1세대 아이돌 멤버이 마치 예전의 시트콤 &amp;lt;LA 아리랑&amp;gt;처럼 정말로 &#039;한국인&#039;과 다름 없으면서 외국에서 중산층적 삶을 영위한 &#039;친해지고 싶은 이복형&#039; 이미지였다면, 박재범 같은 진짜 &#039;해외파&#039;들은 LA에서 세탁소 하고 슈퍼마켓하면서 악착 같이 돈을 버는, 조금이라도 추문이 생기면 &#039;외면하고 싶은 이복 동생&#039;이 되는 그런 (실재적) &#039;교포&#039;인 것이다. 박재범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했던 &#039;돈&#039; 이야기와 같은 것들이 사건이 터지자마자 수면 위로 부상하여, 까임 대상으로 전환하는 것을 보라. 이 순간 &#039;외국인 노동자&#039;라는 것은 단순히 까기 위한 말이 아닌, 정말로 박재범(혹은 외면하고 싶은 이복동생들=교포)을 &#039;외국인&#039;으로 상정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결국 지금의 박재범은 &#039;정말로&#039; 한국 사회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사각지대에서 외면당하는 것처럼 &#039;외국인 노동자&#039;인 것이다. 따라서 &#039;박재범 사건&#039;은 박재범의 행동에 대한 판단 여부를 떠나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039;이주 노동자&#039;, 그리고 &#039;재미교포&#039;들에 관한 시선을 극명히 드러내는 사례가 되는 것이다.&lt;/P&gt;
&lt;P&gt;&lt;BR&gt;&amp;nbsp;2. 아이돌 팬덤 간의 연대는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lt;/P&gt;
&lt;P&gt;&amp;nbsp;박재범의 2PM 탈퇴에 격분한 2PM 팬(핫티스트, 이하 &#039;핫티&#039;)들은 JYP에 대한 불매운동을 선언하고 신문 광고를 내려는등, 또 하나의 팬덤 무브먼트를 일으켰다. 아이돌 팬덤 문화에 호의적인 내 입장에서 상당히 응원해주고 싶은 움직임인데, 문제는 SM과 동방신기의 불공정 계약 문제로 갈등을 벌이고 이미 팬덤 운동에 나선 동방신기 팬덤(카시오페아, 이하 카아)과 &#039;핫티&#039;가 갈등을 빚게 되었다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상황은 이러하다. 박재범의 탈퇴 이후 핫티들은 JYP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신문광고를 위한 광고 시안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벌이게 된다. 그러면서 팬 조직과 상관 없이 일부 팬들이 카아들에게 메일을 보내 함께 신문 광고를 내고, 기사를 내자는등, &#039;연대&#039;와 &#039;협조&#039;를 부탁하게 된다. 문제는 그 와중에 핫티들이 만든 광고 시안이 얼마전 카아들이 낸 신문 광고 시안을 도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또 탄원서 양식 같은 것도 역시 도용 혐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카아들이 동방신기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문구였던 &quot;Always Keep the Faith&quot; 라는 문구를 핫티들이 무단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문구가 카아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카아들이 이런 것들에 대해 큰 분노를 느꼈다는 것이다. 당연히, 카아와 핫티의 연대는 무산되고 말았다.&lt;/P&gt;
&lt;P&gt;관련 링크:&lt;/P&gt;
&lt;P&gt;&lt;A href=&quot;http://poplez.net/xe/?mid=guestbom&amp;amp;page=3&amp;amp;document_srl=3018868&quot;&gt;http://poplez.net/xe/?mid=guestbom&amp;amp;page=3&amp;amp;document_srl=3018868&lt;/A&gt;&lt;/P&gt;
&lt;P&gt;&amp;nbsp;개인적으로 상당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 물론 핫티들이 팬덤 간의 관계에서 상당히 민감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을 건드리긴 했으나, 거시적 차원에서 유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두 거대 팬덤이 공동으로 행동했다면 상황이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동방신기 팬들은 물론 기획사의 일방적인 불공정 계약에 의해 동방신기를 압박한 &#039;동방신기&#039; 문제와, 본인의 연습생 시절 실수로 의하여 기획사에서 자의건 타의건 탈퇴하게 된 박재범의 경우가 어떻게 같은 것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결국 두 사건 모두 결정적인 부분에서 같은 층위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이돌 그룹의 계약 문제나 탈퇴, 혹은 해체와 같은 문제들이 전적으로 기획사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고, 여기에 팬덤의 의사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는 것, 이 것이 바로 두 사건의 본질인 것이다.&lt;/P&gt;
&lt;P&gt;&amp;nbsp;팬덤이 자기 스스로의 &#039;권리&#039;를 선언할 수 없는 상황이, 한국 아이돌 팬덤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비극인 것이다. 동방신기 팬덤과 투피엠 팬덤은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에서, 서로 힘을 합함으로써 문제 상황을 더 좋은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투피엠 팬들의 부적절한 행동 자체는 타 팬인 내가 보았을 때도 눈살을 찌푸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 최다 인원을 자랑하고 또 다년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동방신기 팬덤, 카시오페아가 신생 팬덤의 이러한 실수를 껴안고, 함께 갈 수는 없는 것인가? 카시오페아가 국가인권위에 제출한 진정서 내용 중에서는 동방신기에 대한 불공정 계약이 SM만의 잘못이 아닌, 국내 연예 기획사 전반이 가지고 있는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카시오페아는 SM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2PM 팬들과 함께 JYP의 문제에도 침묵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닌지? 나는 이러한 점에서, 카시오페아들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상당히 아쉽게 생각되는 것이다.&lt;/P&gt;
&lt;br /&gt;</description>
			<category>잡담</category>
			<category>2pm</category>
			<category>jyp</category>
			<category>교포</category>
			<category>동방신기</category>
			<category>박재범</category>
			<category>아이돌</category>
			<category>외국인 노동자</category>
			<author>(프리스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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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3 Sep 2009 19:09:3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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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만주국 세미나 (5)</title>
			<link>http://www.eesoul.net/tc/freesty/entry/%EB%A7%8C%EC%A3%BC%EA%B5%AD-%EC%84%B8%EB%AF%B8%EB%82%98-5-1</link>
			<description>&lt;FONT color=#333333&gt;&lt;FONT face=돋움&gt;한석정,『만주국 건국의 재해석』, 제 3장 &amp;lt;국군과 경찰&amp;gt; (2)&lt;/FONT&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오래간만에 만주국 세미나 발제를 작성해 본다. 아직도 만주국에 대한 탐구가 오늘날 한국에서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적 기획(이것이 아나키스트적 전망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을 꿈꾸는 이들에게 매우 유효할 것이라는 데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최근 그나마 약간의 균열들이 주목되고 시작했지만 한국사의 ‘매끄러움’이란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상치되는 돌출부들을 억압하는 한에서만 이루어진다. 만주국은 그러한 돌출부 중 하나이다. 비록 만주국이 한반도의 역사는 아니지만 같은 일제의 준식민지로서 우리에게 복잡한 감정을 자아내는 공간임은 틀림없다. 해서 기존의 민족주의 성향의 한국사 전공자들이 여기서 찾아내고자 했던 것은 식민지로서 당해야 했던 수탈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다뤄왔다시피 사실 무력이 횡행하던 만주 일대를 안정화시킨 것도 만주국이고, 마냥 일본 관동군의 욕심에 만주국이 설립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비적들의 ‘협력’에서 우리는 익히 알 수 있었다. 또한 ‘치욕의 과거’식으로 해석되는 ‘식민지’ 시절이 하나하나 따져보면 심지어 당시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근대 국민국가와도 커다란 차이가 없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오늘부터 다루게 될 것은 억압적인 수탈기지로서의 식민지라는 상을 넘어 본격적인 국민국가로 도약하려 했던 만주국의 모습이다. 다시 말해, 쥐어짜는 ‘병영국가’가 아닌 국민의 안전과 이익을 약속하는 ‘문민국가’의 면모이다.&lt;/SPAN&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quot;&gt;병영국가 벗어나기의 세계적 경향: 아프리카의 경우&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허나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런 식의 변화가 만주국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제가 아닌 유럽식민지의 경우 20세기를 지나면서 대부분이 ‘군사적인 허물’을 벗기 시작했다. 식민지 관리와 행정은 기존의 무장개척자들 대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민간관료들이 대체하기 시작, 이른바 ‘관료제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변화를 촉발한 요인들은 무엇일까? 일단 아프리카만을 사례로 놓고 보자면 크게 4가지 요인을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quot;&gt;①반란 등 내부 치안의 문제를 일단락한 뒤 피지배층을 어루고 달래기 위함&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quot;&gt;②본국의 민간 관리들을 열대지방에 보낼 수 있는 위생 조건의 개선. 위생 사업 자체가 근대의 주요한 조건 중 하나임을 여기서 강조해 놓자.&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quot;&gt;③본국에서 식민지에 보낼 수 있는 고등교육 이수자가 이 시점에서 드디어 양성. 일종의 청년 실업 해결책으로 식민지의 행정관료가 제시된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quot;&gt;④당시 본국에서 형태를 갖추어 가던 관료제화 현상의 여파&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아프리카의 사례이고 이 4가지 요인들로 해결되었다고까지 말하기는 힘든데 학자들이 게을렀다기보다는 이 지점이 대답해야 할 질문이 꽤 크기 때문이다. 그 질문이란 &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외래정복자들이 군정을 쉽게, 아무 세력에 별 구애받지 않고 펼 수 있는 식민지에서 왜 그 통치양식을 바꾸었는가?”&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quot;&gt;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무력으로 치면 제국주의 열강과 피식민지들은 한참 혈기왕성한 대딩과 초딩에 비유될 수 있다. 그냥 꿀밤 몇 대 쥐어박고 삥뜯으면 될 텐데 무엇하러 복잡한 행정절차을 만들고 ‘우리는 하나’니 강조하며 심지어 ‘복지’까지 챙겨주어야 했다는 말인가? 이 질문을 회피하는 것이 식민지 수탈론이다. 그렇게 하면 마음껏 제국주의 국가들을 악마라고 욕할 수 있으니 마음은 편할지 몰라도 학술적으로 엄밀하지 못하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나아가 이는 제국주의를 비판한다는 정치적 목적에도 매우 손해인데 적을 만만하게 평가함으로서 스스로의 주장을 허약한 기반에 위치시키고, 나아가 수탈이 아닌 근대화, 복지 등을 제국주의와 무관한 탈식민화 국가의 특권으로 상승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복지’ 또한 하나의 ‘지배 양식’이라는 것이다. 돼지를 때려서 키우나 꼴을 먹이면서 키우나 인간으로부터 돼지가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 다양한 사료를 놓고 그 중에서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면 돼지는 그것을 자유로 착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군정이 아닌 식민국가’라는 역설?: 만주국의 경우&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일제의 식민지였던 한국에 사는 주로 유럽이 지배했던 아프리카의 사례는 ‘남의 일’로 간주될 수 있지만 흔히 한국 못지않게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는 만주국의 경우는 다르다. 만주국의 사정은 그럼 어떠했을까? 익히 말했듯이 1920년대 만주국 이전의 군벌체제에서부터 일본종부와 육군참모본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관동군의 ‘선전포고 없는’ 전쟁까지, 구체적 사건으로는 만주사변 ․ 러허침공 ․ 군부 내 갈등 ․ 소련과의 국지전 등등, 만주는 끊임없는 무력의 긴장 속에 놓여 있었다. 일본 행정부 군부의 상층과도 중국이나 여타 세력과도 독립적인 관동군이라는 대병력이 주둔한 전진기지라는 특성을 고려해 볼 때, 만주국의 통치에는 ‘군정’, ‘병영국가’가 가장 적합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 농촌의 중국인 지주들이나 도시의 일본인(주로 상공업자) 공동체가 사회적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큰 힘을 행사하지 못했다. 즉 관동군은 당시 만주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만주국의 성장은 군사적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심지어 만주국에서 형식적인 의미에서의 노골적인 군정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1. 민간관료의 등장과 군부의 침묵, 관료제화&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 1)민간행정관료의 대두&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전반적인 행정은 군인들이 아닌 민간인들에게 맡겨졌다. 이는 군인들에 의해 운영된 아프리카의 초기 식민행정과의 큰 차이점이다. 이른바 ‘혁신관료’라 불리는 일본인 경제 관료들이 정부의 각 부처의 주요 위치에 포진, 주된 정사를 책임졌다(관료들의 이름은 책 99쪽부터를 참조). 잠깐 옆길로 새자면, 그렇다고 이들이 일본 내에서 비주류 정파에 속해 만주로 쫓겨온 것은 마냥 아니었다. ‘만주 파벌’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마츠오카 요오스케, 키시 노부스케, 그리고 토오죠오 히데키가 포함된 이 파벌은 패망 때까지 일본 정부 내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다시 돌아와서, 이런 일본에서 교육받은 젊은 행정관료들의 유입은 만주국 초기 정부 요직을 차지한 비적․군벌 출신의 중국계 원로 장군들을 대체한다. 군벌이 사라지고 만주 지방의 군사적 색채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 2)관동군의 자기은폐&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또한 특기할 점은 관동군은 실질적으로는 무력을 독점한 지배자임에도 불구하고 애써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려 했다는 것이다. 관동군은 만주국 정부에 결코 공개적으로는 지령을 보내지 않았다. 수많은 정부 훈령 중에서 “관동군”이라는 말은 초기 5년간 나타나지 않았다. 만주국에서 관동군의 위상을 감안해 볼 때 이런 침묵은 의도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이렇게 두 토대, 민간행정관료의 대두와 관동군의 이러한 자기은폐 위에 만주국은 빠르게 관료 조직체로 짜여 나갔다. 서구에서는 적어도 1세기가, 일본에서도 최소 수십년이 걸린 관료제화를 만주국은 그야말로 벼락치기로 이루려 하였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 3)벼락치기 관료제화&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우선 건국(1932) 첫 4개월 동안 정부 조직의 기본적 뼈대, 예컨대, 부서간, 중앙부서와 성, 성과 현의 분업, 승진과 호봉체계 등이 만들어져 만주국의 몰락까지 유지되었다. 공보 1호(1932년 4월 1일)에는 관리의 근무시간과 각 부서의 직인을 포함하는 세부사항이 발표됐고, 둘째 달에 공문서 작성과 송달 등의 규칙이 만들어졌다. 첫해 동안에는 경찰의 명찰, 정부 모든 부서의 영문 표기, 촉탁직의 임금 체계, 어려 종의 통계, 간행물 발간 등 전체 관료 조직체를 움직이는 대부분의 규율들이 정해지고 시행되었다. 이런 규칙들은 성긴 일반 목표를 제시하는 걸 넘어 모두 수많은 항목이 부착된, 엄청나게 세밀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물품회계규칙의 경우, 모든 사무 용품의 모양, 재료, 색깔까지를 명시하고 있었다. 또한 이런 세밀함 이외에도 규칙들은 관료를 단련한다는 교육적 목적 역시 지니고 있었다.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는 지침들이 나열되었다. 행정적 훈련 이외에도 만주국은 관리들의 정신, 도덕성 훈련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정부는 회계상의 독직이나 뇌물 사건을 엄중히 경고하고, 그런 일이 발생했을 시에는 철저한 조사를 명했으며, 심지어 부처 이전 시나 명절에 선물을 주고받는 관습까지도 금지했다. 거의 만주국은 히스테리적이라 할 만큼 관리들을 들볶는데 병가를 받은 관리들의 명단을 공개했으며, 오후의 휴게 시간 단축을 명하고, “게으르고 품위 없는” 관리들의 징계 규칙을 세웠다. 형무소 관리들의 경우, 의복과 청결 사항을 포함하는 260개의 수칙을 지켜야 했으며, 1936년부터는 걸음걸이까지도 점검하는 검열을 실시하였다. 재밌는 것은 이런 엄결한 규율을 지키지 않는 관리들의 직위 남용과 나태함이 발견될 때마다 항상 그것을 “군벌 시대의 폐습이며, 왕도(만주국의 공식 구호 중 하나)의 새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짓으로 매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군벌 체제에 대한 만주국 정부의 뚜렷한 청산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런 관리들의 훈련은 뒤에 또(아직 남았다!) 다뤄질 것이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이런 관료들을 위한 규칙 말고 첫해에 주요한 정부 기관과 미래의 국가사업이 형태를 드러내었다. 건국 &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 mso-ascii-font-family: 돋움&quot;&gt;석 달&lt;/SPAN&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 안에 이뤄진 일들을 나열해 보면, 소금 전매, 곡물 통제, 국기, 특별시제, 동성 특별구, 감찰원, 중앙은행, 농업협동조합, 통계청, 건국선전협회, 토지국, 몽정부(몽고인 담당 부서), 경찰학교, 경찰청, 특별 경찰, 영사관, 적산대책위원회(군벌 장쉬에량의 재산 처리를 위한), 방역, 사회 조사, 토지 조사, 새 화폐 주조, 새 교과서 저작에 관한 계획 등이 ‘한꺼번’에 만들어 졌다. 잠을 하루에 4시간 주무신다는 분도 울고 갈만큼의 추진력을 만주국 관료들은 보여주였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따라서 거의 매일 정부공보는 새로 만들어진 법령, 규칙, 훈령의 발포과 개정으로 도배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가속화를 가능케 한 데에는 만주국에 ‘의회’, 입법부가 사실상 없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참의부’라는 기구가 있기는 하였으나 ‘의회’라는 간판만을 달아놓고 있을 따름이었다. “의회가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행정부의 결정에 어떤 저항도, 지체도 없는 만주국에서 법령은 쉽게 만들어졌다.”&lt;/SPAN&gt;&amp;nbsp;&lt;?XML:NAMESPACE PREFIX = O /&gt;&lt;O:P&gt;&lt;/O:P&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2. 사회의 규율화, 시어머니 만주국&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이 즈음에서 우리는 국민국가 건설에 왜 군정이 적합하지 않은지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얻게 된다. 비록 처음 국가의 업무를 구획지은 것이 군인들이라 할지라도, 국가의 업무 범위라는 것은 군인들이 다룰 만큼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총무청과 함께 중앙 정부의 가장 중요한 조직이었던 민정부가 했던 일들을 보면 그야말로 국민의 ‘시어머니’가 따로 없다. 민정부는 대단한 인력을 부리며 새 건물의 화장실 설계를 조사하고 자전거, 수레, 심지어 개에도 번호판을 발급하고, 기녀들의 보건 상태를 매월 체크하는 등 사회생활 구석구석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기든스가 근대 국민국가의 중요 특징이라 하는 “정보의 비축”에도 매우 적극적이어서 재산, 토지, 건설에 대한 보고는 물론이요 식량 재고, 가구, 위생, 쓰레기 수거까지 포함한 보고가 이뤄졌다. 조금 더 나열해 보자면, 공동묘지, 도로, 전염병 예방, 초등학교 교과서, 종교, 교사, 사당, 사회교육 시설, 도서관, 박물관, 극장, 클럽, 여타 사회오락 시설 등의 조사가 명해졌다. 대도시는 가구 수를 매월, 소도시는 1년에 두 번 보고해야 했다. 민정부는 지방 부서에 약 100개의 훈령을 매년 보낸다. 이런 훈령들은 결코 상징적 효과만을 노리는 데 국한된 것은 아니었는데 이후 동반된 일종의 숙제 검사, 검열과 업무 점수 채점 등에서 정부가 실제로 훈령들이 행해지기를 기대했음을 알 수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사실 ‘군인’이란 국경, 전방이나 변방에서 가시적 무력에 맞서는 데 훈련되어 있는 사람들이지 이런 행정적인 업무의 기획이라든가 시민사회 속에서의 시행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다. 일단 ‘군인’은 ‘민간인’과의 거리에 의해 유지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해서 이런 포괄적인 근대화의 기획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군인은 물론 아닌, 그렇다고 행정에 전념해야 할 관료들도 아니면서 시민사회 ‘속’에서 행동이 자유로운 계층이 필요했다. 이들이 바로 ‘경찰’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 1)만주국 경찰 혹은 제국의 하사관&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사회의 최전선에서 국가가 벌이는 사소한 일을 도맡아 하는 이들은 대부분 경찰이었다. 행정 기구 상으로 만주국 경무사는 민정부에, 지방 경찰청은 성공서에 소속되나, 실제로 그들은 직속 상부에 소속되어있을 뿐 민간인 상사와는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대개 만주국의 정부요직들이 그랬듯이 경무사 책임자 자리도 중국인에게도 돌아가지 않았다. 만주국 경찰은 일반 관료의 몇 배나 되는 인력을 보유했는데, 1935년말 그 숫자는 7만6천여명으로 만주국군에도 도전할 수 있는 숫자였다. 이러한 만주국 경찰의 수는 일본 본토의 것보다도 많았는데, 당시 일본의 인구가 만주국의 두 배임을 감안하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지방의 경우 경찰과 민간인의 비율은 100명당 1명 꼴을 이뤘다. 이런 대규모의 경찰은 단순한 치안 이외에도 수많은 대민 규제 사업을 떠맡는다. 만주국은 외관상 관동군이 최종심급으로 자리잡은 병영국가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경찰국가였던 셈이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일본인 지배자들은 일종의 야심을 가지고 경찰을 양성한 것처럼 보인다. 건국 첫날에 만주국 정부는 모든 지방 관서에 경찰이 되기에 “합당한 사람”을 찾으라는 지령을 내렸고, 1932년 수도에 중앙경찰학교를, 각 성도와 현에 경찰훈련소를 지어 “기본 학력(6년의 초등교육)을 가진 젊고 우수한 남자들”을 미래의 경찰관으로 양성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찰들은 이렇듯 비적과는 연관이 없는 신선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이 처음 맡은 업무는 비적 토벌이었지만 차츰 시장과 거리, 주택, 가게 등 민간사회 쪽으로 업무가 바뀐다. 또 이들의 업무를 나열해 보자면, 넝마주이, 신기료꾼, 우산 수리꾼의 매년 허가증 발급, 지문 채취, 일몰 후 및 옥내 영업 금지가 있다. 소위 ‘잡상인’에 대한 단속이 이뤄진 것이다. 경찰들은 자전거 운전자가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쥐고 타는지”를 감시했으며, 앞서 말했듯이 개와 수레, 인력거에도 번호판을 부착했다. 위험지역의 여행은 단속되었으며, 도로 파손을 막기 위해 차량의 최대 중량을 지정했다. 아편 환자, 기금 출연자, 자동차에 면허증이 발급되었고, 결혼신고서를 포함, 시민들이 써넣을 수백 종의 서식을 배포하며, 수많은 위생 조사 업무, 걸인들을 공공피한소를 데려가며,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상업 범죄자를 체포하고, 청소 캠페인을 벌이고, 극장, 여인숙, 점쟁이들을 조사하며, 소위 불순분자들을 반년 혹은 한달마다 감시했다. 1936년 한 해 동안만 경찰이 이 과정에서 약 8만 5천명을 체포한다. 민정부나 기업은 경찰에 사실상 모든 업무의 시행을 의존하게 된다. 이런 경찰의 활동을 가능하게 한 데에는 약 9만 3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경찰용 전신망이 큰 역할을 한다. 이런 통신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경찰은 정신없이 시민들을 달달 들볶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석정 씨는 아마 만주국 경찰이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라고 묻기도 한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하지만 들볶인 것은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각종 강습(1936년 한 해에 29개의 강습이 열렸다 한다)을 받았고 훈련 센터에 보내졌다. 1935년 중앙 경찰은 매주 경찰의 의복, 소지품, 훈련 상태(발걸음 포함)를 검사하는 몽고지역 경찰의 관행을 채택했다. 경찰은 매년 여러 종류의 검열을 실시하고 이 해 10월부터는 매일 한 시간씩 두 종류의 훈련(일반강습과 신체단련)을 받았다. 비록 훈련과 공무 집행에는 후한 보너스가 따랐지만 이런 단련은 격한 것이었고 또 많은 인력이 교체되기도 한다. 건국이래 경찰에 들어왔다 퇴직한 사람들은 1936년 말 1만 5천명에 달한다. 이는 전체 경찰의 20%가 교체되었음을 의미한다. 첫 5년동안 약 5천 명이 해고, 3천 명이 감봉, 1천 2백명이 견책되었으며, 약 9천명이 질병 및 기타 원인으로 사직하고, 약 700명이 순직한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 2)인민들의 교육&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일찍이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의 지배적인 권력기제를 주권권력이 아닌 규율권력으로 정의한 바 있다. 그런 규율권력을 사회적인 레벨에서 실천했던 ‘장치’가 경찰이었다는 것(물론 경찰 자신도 규율의 대상이었다)을 알았다면 그런 규율권력의 내용, 표상하며 인민들에게 요구했던 바가 무엇인지 다뤄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경찰의 업무들을 나열하며 많은 부분들이 이야기되었지만 말이다. 건국 다음달 만주국 정부는 두 개의 서로 관련되는 명령을 발행하는데 ‘새 교과서 편찬 계획’과 ‘체육대회’였다. “하나는 인민들의 정신을 통제하고, 또 하나는 신체를 장악하는 것이었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만주국 정부는 학교 체제, 교과목, 교과서 등을 완전히 새로 만든다. 교사 자격 역시 강화되어 전과가 있는 자는 교사가 될 수 없었다. 새로운 교과목인 수신과 강격이 만들어져 건국정신, 만주국인의 의무, 유교 정신 등이 강조되고 옛 교과서의 해악적 요소들 항일 성향의 가요, 일본 제국주의 비판, 국민당 찬양 등의 것을 없앤다. 문교부는 학생들의 의복, 식사, 두발 등과 관련되는 수백 개의 훈령을 학교에 보낸다. 장발, 음주, 흡연은 엄금되었다. 모든 교과서, 그리고 동화책은 문교부에 의해 선정되었다.&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만주국 정부는 건국 첫 해에 학생들과 관리들을 급히 모아 “건국정신을 양양하기 위해” 체육대회를 거행한다. 이후 지방 관서에 현존 체육시설 현황과 개선책 연구를 명했고 “국민체육운동”이 벌어진다. 1933년에는 “국민의 건강을 증진하고 민족협화를 실현하기 위한” 만주국 체육협회가 발족되고 각 지방에 지회가 만들어진다. 문교부와 모든 성, 현공서에 건국정신, 민족협화, 유교정신, 위생, 보이스카웃 등에 관한 강습과 문화시설(도서관, 강습장 등) 유지를 맡는 부서가 생긴다. 모든 현공서는 ‘민중교육관’을 설립하고 그 실적을 보고해야 했는데 교육관의 운영은 글읽기, 시민정신, 생계, 건강, 유희 교육 등 5개 목표를 가졌다고 한다. 교양부터 오락까지 죄다 국가가 일일이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바탕글&gt;&lt;SPAN lang=EN-US style=&quot;FONT-FAMILY: 돋움; mso-fareast-font-family: 돋움; mso-hansi-font-family: 돋움&quot;&gt;&amp;nbsp;이렇게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사회교육’에 정부는 큰 기대와 노력을 투자했다. 현공서에서 사회교육을 담당하는 관리는 문교부에 올라가 새로운 강습을 받아야 했으며, 개중에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일본에 유학을 다녀오는 이들도 있었다. 만주국은 러허를 침공했을 때도 가장 먼저 교육관을 설립하여 큰 예산을 할당, 특별 강습들을 실시했는데 이는 사회교육이라는 것이 새 국가를 건설하는 것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데 보여주는 사례이다.&lt;/SPAN&gt;&lt;/P&gt;&lt;/FONT&gt;</description>
			<category>공부</category>
			<author>(프리스티)</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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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08 Sep 2009 18:50:3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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