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2009/06/19 00:30
1. 만주국에 대한 이론적 고찰

 1) 통치 비용


 우리는 왜 일본제국이 만주 지방을 조선이나 대만과 같은 '식민지'로 점령하지 않고 '만주국'이라는 국가를 내세웠는지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은 역시 ' 통치비용'의 문제다.


 '열강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통하여 본국의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 시킬 수 있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오히려 제국주의/팽창주의적 정책을 폈을 경우 드는 경제적 비용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이 학계의 상식이다.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한 월러스틴 같은 사람은 로마 제국은 엄청나게 확장된 영토 때문에 제국의 중심이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에 멸망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식민지인으로 설움의 역사를 가진 한국인들은 감정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문제일 수도 있지만, 제국주의 국가는 제국주의 국가 나름의 고충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강들의 식민 사업도 통치 비용을 고려해 나름 다양한 방법들로 이루어졌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방법인 직접통치(ex - 일제의 조선 식민 지배)는 식민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식민지에 관료들과 군대를 보내야 하는, 지배 국가에겐 상당히 돈이 많이 들어가는 방법이다. 일본 제국은 30년이 넘는 조선 식민 지배 기간 동안에 조선 총독부에 매년 평균 400만엔이라는 거금을 보내주어야 했다. 이는 1930년대 일본 정부의 연평균 일반회계 지출의 1%에 해당한다. 그냥 지배하고 수탈한다고 해서 식민 총독부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소리다. 따라서 이러한 직접 통치의 방법을 채택한 열강들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는 않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식민지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접근 방법을 택했다. 그에게 식민지란, 다른 열강들을 쫓아 내고 제한적인 행정 사무를 두어 경비를 최소화 시킨, 이득을 낼 수 있는 교역 상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식민지를 여럿 확보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많은 식민지는 제국 질서의 교란만 낳는 법이다.

 영국의 경우 '영국과 토착인들 양자의 상호이익을 증진하고, 토착세력, 관습, 재판 체계를 존중한다'는 명분 하에 간접통치 방식을 채택했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배할 때 최대한 지역 토호들의 이익을 보장해주면서, 인도인 병사들을 동원해 식민지 방위 비용을 절감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프랑스는 영국과 달리 직접적이고 중앙 집중적인 형태를 택했는데, 이에 수반되는 재정 부담을 덜기 위해 식민지 방위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 경비는 식민지에서 수탈하여 사용했다. 이러한 방법은 식민지 토착인들에 대한 무시무시한 세금징수를 낳아, 결과적으로 끝없는 반란과 유혈 진압의 역사를 낳게 되었다.


 직접 통치는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식민지인들의 법적 지위였다. 만약 식민지가 직접 지배로 인하여 본국에 편입된다면, 프랑스 의회에 알제리 대표가 참석했던 경우처럼 식민지인 대표의 선출을 허용하거나, (형식 상이라도) 본국 헌법이나 국민으로서의 혜택이 식민지인들에게도 확대되어야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비해 영국의 간접통치는 본국 정부가 식민지를 상대로 징세를 하지 않고, 식민지 법령과 같은 문제는 총독부와 지역 세력 간의 협의에 맞기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편이었다. 직접 통치의 경우 식민지인들이 자국 국민과 (법적으로는) 같은 지위를 가지기 때문에 식민지인들이 본국으로 이주해오는 문제를 발생시킬 수도 있었다. 이는 인구, 실업 문제를 초래하는 위험한 경우였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인종주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직접 통치 방식이 가져온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만주국의 경우는 어떤가? 일본이 이러한 이유로 통치비용을 고려해 선택된 형태일까? 이미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기 이전부터 미츠이 물산과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라는 거대 기업들을 통하여 만주에 투자와 교역을 확대하면서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만주는 일본 본국에 원자재와 농산물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일본이 섬유 판매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 판매처이기도 했다. 굳이 만주국이라는 국가를 세우지 않더라도 일본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만주에서 이익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만주국이 생긴 이후, 만주국의 설립 유지 발전을 위하여 들여야했던 일본의 투자 비용은 막대했다. 만주국과 일본의 역대 경제 수지 관계를 산술적으로 따져봤을 때, 결과적으로 일본에서 만주국으로 흘러간 돈이 훨씬 많았다!!!


 만주국은 일본국의 재정 지출을 이끌어낸 중요한 요인이었다. 만주국 1차 경제 개발 계획(1937)과 관동군의 만주 주둔으로 인해 일본 정부가 써야했던 돈은 막대했따. 관동군 주둔 비용인 '만주 사변 경비'만 해도 6년간 13억엔에 달했으니(앞서 보았던 조선 총독부의 예를 떠올려보면 얼마나 큰 돈인지 느껴질 것이다.) 어떻게 보자면 만주국 전체 역사를 통해 일본이 거두어간 것보다 넣은 것이 더 많다는 지적도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일본이 만주국에 투자한 비용을 뽑아가기도 전에, 만주국이 너무 일찍 망한 셈이다. 어찌 되었든, 만주국에 들어간 막대한 국가 비용은 만주국이 영국식 간접 통치와는 다른, 그리고 프랑스식 직접통치와도 다른, 새로운 방식의 '독립국'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 주권의 문제


 오늘날 주권에 관한 논의는 대체로 주권적 힘의 소재를 두고 갈려진다. 이는 궁극적 권력이 국가를 구성하는 인민(주권재민), 혹은 국가 그 자체(국가주권)에 있다느 ㄴ논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주권이 가진 외부성을 간과하고 있다. 주권은 실제로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특히 만주국의 경우가 그 극명한 예다. 만주국 정부는 1932년 3월 독립을 선포했찌만, 국제 사회는 이를 외면했고 만주국은 '괴뢰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괴뢰국'은 무엇인가? 통상적인 정의라면, 괴뢰국이란 주요 정책이 외세 혹은 패권국에 의해 조정, 결정되는 나라다. 또 다른 의미로는, 자주 국방이 불가능하여 외국군의 주둔을 허용하거나 강대국과 연계를 맺는 나라다. 그러나 이러한 두 정의를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20세기의 많은 주권국들이 실제로는 모두 괴뢰국이라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두번째 정의를 적용하자면, 미군 주둔이 허용된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구 서독과 같은 경제대국들도 올바른 주권국가라 부를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주권 국가'를 이루는 중요한 기준은 '국제 사회의 인정'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근대 주권 국가의 형성은 1815년의 국제 협약이라 할 수 잇는 '빈 협정'을 그 계기로 하고 있다. 오늘 날에도 UN과 같은 국제 기구로 부터 인정을 받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가 정말로 국가인지 아닌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국제 사회에서 외면 받았던 만죽구은 '주권 국가', '독립국'이라고 말하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주국은 스스로 독립국이라고 할 만한 그럴듯한 이유를 가지고 잇었다. 우선, 식민지에 거주하는 피식민 지배자들이 본국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경우가 역사에 가끔 있다. 1960년대만 해도, 백인 거류민들이 본국에 맞서 독립하여 로디지아를 건국했다. 만주국과 일본 정부 사이에서도 일정 기간 유형 무형의 긴장이 존재했다. 일본의 1920년대는 보통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시기라고 말한다. 메이지 시대를 지나 다이쇼 천황의 집권기였던 이 때, 일본에서는 사회주의가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자유주의 세력이 힘을 얻게 되면서 군부 세력이 이전의 힘을 잃게 되었다. 민간 정치지도자들은 군대의 예산을 삭감하면서 이러한 상황을 가속화 했다. 이 때 군부 불만 세력들이 요인을 암살하거나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는데, 1936년의 2.26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때 사건 연루자들에게 큰 처벌이 내려지지는 않았는데, 이들이 만주로 전출되면서 본국에서의 세력 감소에 불만을 가진 군부가 만주국을 자신들의 새로운 거점으로 삼으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국은 도쿄의 일본 정부에게 간섭받지 않는 공간이라는 정서가 강했다. 이러한 정서에 의하여, 군부는 만주에 제국을 세워 외부를 향해 주권국 행세를 한다는 전략을 세운다. 만주국 황제는 일본제국의 상징적 질서에서 일본천황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보다도 높은 사람이 될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민간 정치지도자나 의회의 간섭을 막을 수 있는 상징적 방패막이가된다. 만주 사변과 만주국 건국 과정에서 일본 정부의 군사적, 정치적 결정이 빈번히 관동군에 의해 거부되었던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만주국은 독립국으로 보이기 위한 많은 국가적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빠른 속도로 근대 국가가 갖추어야할 조직인 관료제와 경찰 조직, 만주 국군을 창설한다. 보통 근대 국가의 형성은 적어도 수십년에서 많게는 수 세기가 넘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지만, 만주국에서는 무력을 장악한 군부에 의해 민간 사회가 근대 국가의 형태를 갖추어 정리되는데까지 몇 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만주제국 황제인 푸이는 궁정 연회, 순시, 관병식, 국민 훈시등을 통해 만주국의 '건국 정신'을 홍보했다. 자연재해가 날 때 마다 정부 차원의 '구제사업'이 발표되었다. 요컨대, 외부의 인정은 없었지만 만주국 스스로는 독립국으로서 자리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2009/06/19 00:30 2009/06/19 00:30
Posted by 프리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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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en9uin

    통치 비용의 7번째 문단에 오타 발견입니다(맞기기->맡기기)

    식민지 법령과 같은 문제는 총독부와 지역 세력 간의 협의에 맞기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리고 만주국이 스스로 독립국이 되려고 노력하는 배경을 설명하실 때 일본의 정치 상황이 언급되는데요. 본국에서 불리한 입장이었던 군부 세력이 끝까지 살아남아(?) 만주국에서 세력을 다시 확장시켜나갈 수 있었던 것은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 되었기 때문이었나요? 아니면 반대 세력, 사회주의나 자유주의 세력이 군부를 완전히 제압할만큼 강하지 않았던 것인지요? 요인 암살이나 쿠데타같은 경우는 실패했을 때 관련 세력이 완전히 반대 세력에 의해 척결되는데, 그런 시도가 있었고 실패했음에도 끝까지 세력을 유지하게 되는 셈이잖아요. 결국 이 군부 세력이 나중에 태평양전쟁을 주도하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더 궁금하군요. 다음 편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2009/06/21 23:52 [ Permalink : Modify/Delete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