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라타니 고진 : <유머로서의 유물론>, '이토 진사이론'에 대한 독서후기
1.
<논어>에 관하여 특기할만한 사실은, 그 것이 '대화'록이라는 점이다. 논어는 공자가 '일대일의 관계'에서 타자에게 했던 말들을 옮긴 책이다. 따라서, 논어는 일반적인 책들과 달리 불특정 다수의 '일반적 타자'에 대하여 말해진 책이 아니다. 게다가, 논어는 공자에 의해 쓰여진 책이 아니라 공자의 말들을 제자들이 모아놓은 책이다.
재미있게도, 공자와 같이 이른바 인류의 큰 스승으로 이야기되는 붓다, 예수, 소크라테스 모두 스스로 책을 쓴 적이 없다! 이는 그들의 시대에 쓰는 습관이나, 철학적 사상의 체계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공자가 살던 춘추 시대에는 제자백가라고 칭해졌던 수많은 사상가들이 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붓다 역시 브라만 교를 비롯한 종교-철학들이 난립하던 시기를 살았다. 예수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참조) 소크라테스 역시 그 이전에 수많은 소피스트들이 제 각기 철학을 펼치고 있던 시기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쓰지 않았던' 것일까? 가라타니 고진은 그들이 책을 쓰지 않은 것은, 쓰는 일(일반적 타자를 향하는 일)로 인하여 소멸되어 버리는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물론 그들은 제각기 다른 종교/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각각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가 항상 일대일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점, 그리고 결코 그때까지의 문제에 대해 답하지 않고 그 문제 자체를 무효화 한다는 점. 그리고 그 것을 (관계 맺는) 타자를 사랑한다는 문제로 바꾸어버린다는 점에서 그들은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공자는 '효'를 말한다. 그러나 그 것은 공자 이전까지 존재했던 혈연적 공동체의 선조 신앙과는 관련이 없다. 선조 신앙은 죽은 선조가 영靈의 형태로 살아있는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는 "아직 인간을 섬기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귀신을 어찌 섬기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는 영혼은 없다, 라는 주장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영혼을 섬기는 일이 아니라, 살아있는 타자와의 관계'라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효'는 혈연적 관계와는 단절적인 것으로, 부모를 '관계 맺는 타자'로 삼는 행위다. 그리고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가 된다. 넓은 의미에서 '효'가 군 사 부에게 모두 적용된다는 것을 따져볼 때, '효'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가족주의와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 것은 예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것이니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1장 27절 ~ 11장 33절
여기서 예수는 자기가 그리스도임도, 예언자임도 말하지 않는다. 그 것을 증명할 증거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만일 그 증거가 명확이 존재한다면, 이제까지의 예언자들은 박해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전의 예언자들이 정말 예언자였다는 것을, 바리새인(당시 이스라엘의 보수적 종교-지식인 무리)들은 민중의 믿음이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나중에야' 인정한다("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바로 눈 앞에 있는 사람, 즉 일대일 관계에 있는 타자를 예언자라고 증명할 수 있는 '권위'는 어디에도 없다. 기적이나 신비와 같은 것은 엄밀한 '증명'이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신앙을 일반적인 규범이나 증명을 통한 '권위'가 아니라("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적 결단'에서 찾고 있다. '내'가 '믿'는다는 결단을 통해서만 신앙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를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지 않고 반문할 뿐이다. 공자 역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공자/예수의 사상은 그런 식으로 밖에 존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일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2.
그렇다면 왜 '그런 식'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대화'에 대해서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대화' 규정을 살펴보자.
"나는 자기 대화, 또는 자기와 똑같은 규칙을 공유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대화라고 부르지 않기로 하겠다. 대화는 언어 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만 존재한다. 또 타자란 자기와 언어 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타자와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가르치는' 입장에 선다는 것은, 달리 말해 타자, 또는 타자의 타자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조금 어렵지만 차근차근 따져보자. 왜 고진은 '자기와 똑같은 규칙(언어 게임)을 공유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대화라고 부르지 않는가? 대화의 사전적 정의는 '마주 대해 이야기함'이다. 여기서 '마주 대'한다는 것은 '이야기를 나누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타자)'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와 언어 게임을 공유하는' 사람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니다. 이를테면 궁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선임이 후임을 '갈구는' 것이 당연한('짬' 논리라는 규칙을 공유한) 궁에서는 이질적인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짬 논리를 공유하고 있는 궁에서는 '갈구는 문화'가 당연스럽게 지속된다. 그렇기 때문에 궁 문화 안에서 '(이질적인)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 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신병(이질적 타자)이 오는 순간을 가정해보자. 보통의 한국 남성이라면 사회에서 부터 어느 정도 궁의 언어 게임을 숙지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 신병의 등장으로 인하여 궁 문화에 치명적인 위기가 오진 않지만, 만약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 프랑스(물론 이 것은 '가정'에 불과한, 이상적인 '외국'으로서의 프랑스다.)에서 아무것도 모른채 20년을 살다가 모종의 이유로 급작스럽게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입궁하게 된 신병이라면 생활관에 만연한 짬 논리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이 때 신병은 이질적 타자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때야 말로 '궁 문화'에서는 '대화'가 등장한다.
쓰다보니 갑자기 재밌어졌으므로 계속 이 사례로 밀고 나가보겠다. '타자와의 관계는 비대칭적'이라는 고진의 말은 무슨 뜻인가? 아까 그 신병(타자)이 없는 생활관에서는 '짬 논리 궁 문화'가 변함 없이 지속적으로 승계됨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다. 이러한 생활관에서는 내부적인 위계가 존재하긴 하지만, 이는 대칭적인 위계다. 병장 부터 이병까지 자신이 짬이 찰 수록 자연스럽게 위계 질서의 상층부로 올라갈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신병(타자)은 그렇지 않다. 기존에 정해져있는 암묵적인 규칙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이 때야 말로, '가르치다 - 배우다'의 양상, 곧 고진이 말한 '진짜 대화'가 형성된다.
'가르치다 - 배우다'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말뜻과 달리 생활관 기존의 '신송'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행위이다. '신송'은 선임과 후임이 서로 '짬 논리'를 미리 전제해 놓고 정말로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가 깔려있는 이상 선후임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의견 차이는 단지 자기 질문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후임이 선임에게 "제가 왜 선임들의 잡일까지 해주어야 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선후임 사이의 지난한 토론을 거쳐 결국에 '궁은 계급 사회기 때문'이라는 기본 전제가 도출되게 된다. 이는 타자의 반론에 의해, 또는 그 자신의 반론에 의해 명제가 심화되어 가는 '변증법적 대화'에 불과하다. 이러한 형태의 물음에서는 기본 전제를 아예 깡그리 다시 묻는 '외부성(=타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가르치다 - 배우다' 관계는 아예 사고의 프레임 자체가 다른 생활관원(나)과 아무 것도 모르는 프랑스 출신 신병(이질적 타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차라리 하나의 '투쟁'이다. 이처럼 완전한 타자의 등장은 기존에 '문제'라고 인식해왔던 것 - 이를테면 병장은 왜 청소를 안하는가? - 이 얼마나 '사소한 것'인지, 중요한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기본 전제' 부터 다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3.
공자, 예수, 붓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대화'적이다. 붓다는 자아나 본체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대답한다. 이는 '자아나 본체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라기 보다는, 그런 문제는 '아무래도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존의 '문제'가 아닌, 그 외부에 있는 진짜 '문제'를 이야기하자는 말이다. 그러나 이 문답은 '불교 철학'이 성립되면서 심오한 공空의 철학으로 전환되고야 만다. 붓다가 가져왔던 외부성의 문제, 외부성의 위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플라톤이 '정립한' 소크라테스가 아닌, 소크라테스 그 자신을 보아야할 것이다. 잘 알려져있듯이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무지를 가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이야기를 꺼내도록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전략을 통하여 먼저 자신과 대화하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견해를 제시하게 하고, 만약 그러한 견해를 인정할 경우 그 견해 속에 어떤 모순점이 숨어있는지 밝힌다. 이러한 모순점이 있는 한 우리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나 자신을 알게 된다'. 그럼으로써 소크라테스는 그 대화 상대들이 자신의 견해를 밝힐 때 '자신'이라는 기본 전제를 아예 깡그리 다시 묻는 외부성(=타자)으로 등장한다.
4.
여기서 우리는 왜 공자, 예수, 붓다, 소크라테스가 '글(경전)을 쓰지 않았는지' 알수 있게 된다. '일반적인 타자'는 진정한 '타자(=외부성)'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글(경전)을 쓴다는 것'이 실질적으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때는, 자신과 언어 게임을 공유하고 있는 대상들을 향할 때 만이다. 반대로,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과 언어 게임을 공유하고 있는 글을 읽는다는 것이다. 나와 언어 게임을 공유하고 있지 않는 글을, 우리는 읽을 수도 없고 읽을 필요도 없다고 느낀다! 이는 외부성(=타자)을 거부하는 것이다. 소통의 비극은 이러한 까닭에 일어나는 것이다.
둘째, 과연 일반적인 타자는 정말로 타자(=외부성)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는 다른 말로 일반적인 진리가 존재하는가? 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모두를 향해 공적으로 말할 때, 그 것이 보편적인 공감을 얻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친구들과 개별적으로 관계 맺을 때, 나의 말은 나의 행동(윤리적 실천)과 함께 전자의 말과 다른 울림을 가진다. 그리고 여기서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진리, 곧 '사랑'이 등장한다.
당신은 '관계성의 사랑'이 아닌, '보편적 사랑'을 할 수 있는가? 열렬하게 신과 인류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야 말로 가까이 있는 '타자'를 사랑할 수 없다. 신의 이름으로, 인류의 이름으로, 진리의 이름으로 벌어진 잔혹극들을 역사에서 종종 찾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는 공자, 예수, 붓다, 소크라테스의 '사랑'이 그 제자들의 책으로 인하여 '사랑의 보편 이론'으로 정립되었을 때 벌어진 비극들이라 할 수 있다.) 직접적인 관계에서의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고, 이 것을 일반화한 '사랑의 이치'로 만들 때 이는 공허해진다.
5.
여기까지 오면 우리는 공자, 예수, 붓다, 소크라테스의 가장 큰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완전한 진리, 일반적인 진리, 절대적인 진리를 쫓지 말지어다.(당신을 사로잡는 '문제'들을 무효화 해라!) 당신 주변의 타자들과 적극적으로 관계 맺어라.(정말로 진리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대화)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저 사랑하라.(적극적인 주체적 실천 윤리로서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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