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2009/09/06 20:52

 휴가 첫날, 책마을 정모에서 고기를 구어먹다가 나온 이야기였는데, "어느새 야설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라는 지원이의 말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닷새 동안의 휴가 술자리들은 이 이야기를 시발점으로 해서 어떤 '주제'를 가지고 진행되었던 것 같다.
 VT 시절부터 널리 공유되었던 야설, 그러나 어느 순간 부터 야설은 우리에게 잊혀진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아마 많은 이들의 하드 디스크 속에 수십 기가에 달하는 동영상이 있을테고, 혹은 이미지 파일 - 은꼴사라고 불리우는 - 들도 있을 수 있겠다. 몇몇 사람들은 상당 수의 에로게를 보유하고 있을테고.. 그러나 이제 '야설'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 극히 드물게다. 무리도 아닌게, 어느샌가 야설은 우리 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옛날, 그러니까 ADSL의 전국적 보급으로 인터넷 인구가 폭증하고 많은 사람들이 야후 코리아나 라이코스를 검색 엔진으로 쓰던 시절이 있었다. 정보의 공유, 자료의 공유라는 위대한(?) 카피 레프트 정신을 내세운 와레즈들이 명멸하던 그 때, 우리는 검색 엔진에 '야설'을 치면 수많은 웹페이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수많은 작품들이 쉽게 구해지던 시절이다. 그리고 그 어느 곳 보다도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는 그 이름, '소라넷'. (물론 지금도 존속하고 있는 공간이지만, 그 곳은 예전만큼의 대중성을 상실한지 오래다. 한때는 '성인물=소라넷'이라는 공식이 성립되던 적도 있었으니까..) PC통신과 초창기 인터넷을 통해 급격히 외연을 확장했던 야설들은 모니터를 뛰쳐나가 본격 성인 출판 시장이나 모바일 시장에 진출하기도 했었다. '추월색'이나 '인봉거사' 같은 '작가'들은 팬클럽까지 몰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전국민의 인터넷 환경이 모뎀에서 ADSL로, 또 ADSL에서 VDSL로 발전하는 가운데 점차 야설은 우리의 곁을 떠나게 된다. 야사가 야설을 대체하고, 또 야동이 야사를 대체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일본에서 그저께 출시된 AV DVD를 오늘 초고화질로 다운 받을 수 있는, 그야말로 'IT강국'다운 첨단 성인물 문화를 누리고 있다. 이러한 기술문명의 발전 속에, 옛 시절의 추억을 함께했던 야설은 잊혀지고 말았다.
 자, 네이버 검색창에 '야설'을 쳐봐라. 일단 성인 인증 창이 뜨니까 인증하고, 검색 결과를 둘러보자. 페이지가 많이 뜨긴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작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 '야설'을 제공하는 페이지를 찾긴 힘들다. 야설은 이제 우리가 알던 그 '야설'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개념어에 가까운 단어가 되어 쓰이고 있다. ('야설' 같은, '야설'처럼 이라는 수식어를 생각해보자. 재밌는건, '팬픽 야설'이라는 용례가 생겼다는 건데.. 이건 다음에 이야기하고.) 야설이 무언지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정작 이제 야설을 보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야설을 찾기도 힘들다. 패킷 충전만 한다면, 성인물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 원초적 자극을 제공하는 야동들을 종류별로 골라서 받을 수 있는 세상에서, 누가 야설을 보겠는가?

 그러나 이같은 '야설의 종언'은 단순히 야설의 추억을 떠올리며 아쉬워하는 것에 그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분명 야설은 우리들의 추억을 상기시켜주는 흥미로운 소재고, 또 야동에 비해 창의력(?)과 상상력(?)을 증진시켜준다는, 단순히 감각적/말초적 쾌락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도구라고 '변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그 것이 아니다. 단순히 IT 기술 발전 속에 야설이 사라지고 야동이 등장했다, 라는 이야기에서 그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야설에서 야동으로의 전환'이라는 형식이, 다른 분야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게 내가 가진 생각이다. 그리고 이 것은 결국 우리 세대에 있어서 '텍스트'라는 것은 더 이상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책마을 정모 술자리에서 이런 문제를 떠올리게 되었고, 또 이틀 후에 있었던 다른 술자리에서 이 문제가 주제만 바꾸어 다시 제기되었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 문학의 종언> 테제와 문학평론가 조영일의 한국 (문단) 문학 비판에 대한 이야기가 쟁점이 되었는데, 이른바 서브컬쳐 문학을 통하여 '문학의 역습'이랄까, '문학의 헤게모니 전환'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조영일의 관점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이는 고진의 테제를 수용하지만, 그래도 정말로 '문학(텍스트)' 전반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어떻게 본다면 문학에 대한 보수주의적/수호자적 입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조영일의 관점에서, 죽은 것은 '문학'이 아니라 '한국 문단 문학'이다.
 
 술자리 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주제가 하나에 집중 되었다기 보다는 산발적인 이야기들로 이어졌는데, 내가 상당히 재미있게 느낀 부분은 앞서 이야기했던 '야설'에 조영일이 기대를 걸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서브컬쳐 문학을, 이를테면 판타지 소설이나 라이트노벨과 같은 것들, 혹은 팬픽을 대입해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서브컬쳐 커뮤니티/블로그들이나, 심지어 책마을 안에서도 '야설의 종언'과 마찬가지로 '환상문학의 종언'이나 '라이트노벨의 위기'와 같은 것들이 이야기 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 현재 한국 판타지 소설 시장의 흐름은 대략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1. 대중성과 유명세를 확보한 기존 작가들 + '문학'을 표방하는 환상 문학 시장 - 기존 작품에 대한 애장판 출시와, 작가 개인의 색깔을 유지한 신작 발표. SF 등 기타 장르 문학 독자들과 함께 상대적으로 '고급 문학'을 표방하는 매니아층
 
 2. '게임 판타지' 시장(혹은 양판소?) - 어느 샌가 시장의 주류가 되어버린, '온라인 게임'을 소재로 한 작품들.
 
 3. 라이트 노벨 화 - 기존 '판타지 소설' 작가들이 '라이트노벨' 시장으로 진출
 
 4. 기타..
 
 여기서 시장의 규모등에 대한 명확한 통계를 내긴 힘들 것 같은데, 일단 1번의 경우 일정 정도의 '매니아'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시장이고, 2번의 경우 주로 대여점 수요에 의하여 충족되있는 것으로 보이며, 3번의 '한국형 라이트 노벨'들은 시장의 새로운 경향으로 인기를 얻고 있지 않나(혹은 그렇게 기대를 모으지 않았었나), 하는 판단이 든다. 다만 최근 일본 라이트 노벨 시장의 경우를 참조했을 때 라이트 노벨은 작품 본연의 매력으로 팔린다기 보다는(그랬던 때도 있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못하다.) 미디어웍스(애니화/만화화)를 통한 인기를 통해 겨우 시장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고 했을 때 미디어웍스의 가능성이 일본의 경우 보다도 힘든 편인 '한국형 라이트 노벨'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생각 된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게임판타지'건 '한국형 라이트노벨'이건 어쨌든 (조영일을 포함한) 일부 '기성 문학' 씬의 관점에서 "요새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새로운 문학'이라고 평가되는 '서브 문학' 장르 역시 이미 문학/작품 본연의 힘(텍스트)이 아니라, '게임'이나 '애니화'라는 다른 매체의 인기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슬픈 현실이겠다. 이는 비록 그 양상은 다르지만, '야설(텍스트)'에서 '야동(영상)'으로 매체 자체가 변화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해보겠다. "우리 세대에 있어서 '문학(텍스트) 본연의 힘'이라는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닐까? 그 것의 역할은 끝난 것이 아닐까? 일단 이미 문학/텍스트는 전혀 '읽히지 않고' 있지 않은가? '스크롤의 압박'이라는 단어가 말해주듯, 그 내용을 떠나 '텍스트'라는 매체 자체가 이미 우리 세대와 거리가 먼 것이 된 것이 아닐까! 그 반론으로 서브컬쳐 문학을 제시한다면, 난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미 그런 것들이 다른 매체(야동)으로 대체되었거나 혹은 다른 매체(게임, 애니메이션)의 인기에 영합하여 겨우 유지되고 있다고 반박하겠다.

 자, 여기서 좀 더 무리수를 던져보겠다. 그 때 술자리에서는 팬픽션(이하 팬픽) 이야기도 등장했는데, 내 생각이 그러하다면 여전히 젊은 세대, 특히 아이돌 팬덤 사이에서 융성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팬픽은 어떻게 된 것이냐? 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 양상은 다르지만 팬픽 역시도 점차 고립화되고, 또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한창 천리안과 하이텔로 팬픽을 읽던 시절만 하더라도 팬덤과 팬픽 문화는 '분리 될 수 없는 것'이였다. 팬픽 문화라는 것 자체가 팬덤, 팬클럽 문화의 하위 개념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로 10대 소녀들이 대부분인 팬 사이트에서 동성애/성인물 성격의 팬픽들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그 뿐 아니라 잡팬 성향이 강한 팬픽 작가들 자체가 배타적 성격의 팬덤 문화에 반발하게 되면서 많은 팬픽 향유층들은 팬사이트에서 분리되어, 'Only 팬픽'을 지향하는 팬픽 사이트로 이동하게 된다. (주1) 팬클럽 문화에는 아직까지도 팬픽 문화에서 파생된 코드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 이를테면 '커플링'이라던가 - 오히려 이렇게 특정한 코드들만이 팬 문화에 흡수되고 팬픽 자체는 '퇴출'되어버렸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팬픽 문화는 더 이상 일반적인 팬덤 문화와 섞일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일반적인 아이돌 팬의 입장에서, 본격적인 팬픽 향유층은 마치 '오타쿠/동인녀'처럼 여겨지는 경향도 있다.

 그렇다면 팬픽이 도대체 앞서 이야기했던 것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H.O.T, 젝스키스, 클릭비, 신화 등으로 이어졌던 (00년대 초반까지의) 아이돌 팬 문화는 팬픽을 제외하면 방송에 노출되는 아이돌의 모습 말고는 다른 무언가를 접할 수 없던, 상대적으로 자료들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부족한 자료들로 충족할 수 없는 팬들의 마음을 팬픽의 '상상력'이 채워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팬픽이나 커플링 놀이는 팬들 고유의 즐거움으로, 사실 '오빠들'의 존재와 상관 없이 독립적으로 즐거운 창작 행위였다. 그러나 시대 상으로 신화를 기준으로 하여, 동방신기, SS501, 슈퍼주니어 등등 요즘의 아이돌 문화로 진행되면서 아이돌 팬 문화 자체에 큰 변모가 생긴다. 이제는 공중파 방송 뿐 아니라 수많은 케이블 채널과 멤버들의 개인 활동 등을 통해 거의 매일매일 신선한 아이돌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예전에는 팬들이 특정한 방송 스케줄을 기다리고만 있었다면, 이제는 오히려 수많은 스케줄들, 수많은 자료들을 팬들이 따라잡기 바쁜 상황이 된 것이다. 여기서 '오빠들의 빈 자리를 채워주던 팬픽의 상상력'의 역할은 줄어들게 된다. 게다가 인터넷을 통한 팬 문화의 진전은 마음만 먹으면 과거에서 현재까지 아이돌들이 출연한 영상 자료들을 모두 수집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연예기획사나 아이돌 역시도, 자신들이 '커플링'이 팬들에게 주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에 방송에서 의도적으로 이러한 커플링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더 이상 팬들끼리 팬픽을 쓰고 커플링 놀이를 하면서 보낼 시간이 없다! 이미 기획사나 방송국이 이러한 즐길 거리를 충분히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유행하는 케이블 프로그램의 '아이돌 리얼 다큐'들은, 그야말로 팬픽의 방송화나 다름 없는 것이다.) 그 것은 팬픽의 분리로 인한 팬 문화의 빈 공간을 무엇이 채웠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팬픽이 사라진 빈 공간은, 이제 '제공된' 영상 자료들을 움짤로 편집하고, 자작 영상을 만들고, 이에 만족하지 못하면 직접 '직캠'을 찍으러 가는 것으로 채워졌다. 이렇게 수없이 많은 영상이 범람하는 아이돌 시대의 팬들에겐, 이제 자기들끼리 소설을 쓰고 이를 즐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팬클럽 문화와 팬픽 문화의 분리는, 이러한 '매체의 전환'과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 세대에 있어서 진정한 '텍스트 향유층'이란, 아직도 굳건히 소라넷을 지키고 있는 야설 독자들이나, 주류 시장과 분리된 장르 문학 매니아층이나, 팬덤과 분리되어 팬픽 사이트를 세운 언니들이나 그 성격을 막론하고 '야동 시대 / 미디어 웍스 시대 / 케이블 시대'에서 '소수자'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소수자를 제외한 대다수들에게 있어서 더이상 '텍스트 향유'라는 것은 무의미해져버렸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결국 텍스트는 우리 세대와 아주 거리가 먼 무언가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세대의 새로운 목소리를 만들어내야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더 이상 '텍스트'라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우리 세대와 소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들은 참으로 '참담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동시에, 전통적인 영역이 아닌, 새로운 영역을 통한 '이야기 하기'나 '개입'이 요구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닷새 동안의 휴가는, 이러한 고민을 좀 더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주1) 아이돌 팬덤과 팬픽 문화의 분리는 거칠게 말해서 다음과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이돌 팬픽의 기원에 대해 다양한 설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금같은 의미에서 팬픽의 기원은 '젝스키스 팬픽'에 두고 있다. 시작은 H.O.T가 먼저했다, 아니다 태지보이스가 먼저다 등등 이야기는 많지만, 지금과 같은 형태로 팬픽이 정립된 것은, 그리고 '작가들'의 배출이라는 점에서 보았을 때 젝키 팬픽을 '기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H.O.T 팬픽들이 더 자주 소개되었고, 그 중 일부는 PC 통신 소설의 출판 붐을 타고 출판되기도 했다.

 이후 대중음악시장에서 차지하는 아이돌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팬픽 역시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리고 10대 소녀들이 대다수인 팬덤의 성격 상 주로 아이돌 그룹 멤버들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부각하는 방식으로 팬픽이 창작된다. 여기서 수위가 높은 동성애 묘사에 대한 내부 비판 역시 제기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지금도 지속되는 논란이기도 하다.) 게다가 젝키 시절 부터 높은 인기를 누리던 몇몇 팬픽 작가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른 아이돌의 팬질을 하면서, 다른 아이돌의 팬픽을 쓰면서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이돌 팬덤의 충성심이 대단했기 때문에, '잡팬'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이다. 팬픽 작가들이 잡팬 성향으로 흘러가면서인지, 아니면 잡팬 문화가 조금씩 생겨나서 인지는 모르지만 점차 '아이돌 팬이기 때문에 그 아이돌의 팬픽을 읽는다'라는 사람들 보다 '팬픽 독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팬픽 향유층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팬덤과 팬픽 문화 향유층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많은 팬픽 작가들이 팬덤을 떠나 독립 팬픽 사이트를 구성하게 되었다. 게다가 10대 미성년자 팬들이 많은 팬덤과, 성적 수위 측면에서 20대 성향이 강한 팬픽 문화 창작층의 세대적 괴리 역시 팬덤과 팬픽 사이의 분리를 촉발하게 된 면이 있다.

2009/09/06 20:52 2009/09/06 20:52
Posted by 프리스티

Leave your greetings.

  1. 고동기

    세상에나...! 전 그저 지나치고 흘려버렸던 것들을 이렇게 예리하게 짚으시다니. 상상력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극 소수가 되어가고 있고,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만 늘어나는 듯. 상상력을 피워낼 수 있는 환경이 사라지니까 점점 수동적으로 변하고. 소수의 창작자, 정보제공자, 언론 등등 커다란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만 반응하게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아니 그렇게 만들려 하고 있는 건지.

    2009/09/07 04:52 [ Permalink : Modify/Delete : Reply ]
  2. SaToMe

    동기님의 댓글도 멋지네요, 후

    2009/10/15 11:55 [ Permalink : Modify/Delete : Reply ]
  3. 이강진

    텍스트를 향유한다기 보다는 텍스트로부터 산출되는 이미지를 향유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상상력이란 결국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텍스트"에서 "소비자"가 얻어내는 이미지는 스스로가 의도하였다기 보다는 일련의 "판매자"가 "그렇게 상상하도록" 유도한 것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문학에서 이야기하는 "통로와 소통"의 문제는 대중문화에서 의도하는 일종의 "담론의 유도"와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소위 "텍스트"들은 이 둘 사이의 경계를 거칠게 허물고 있는 일종의 파괴자가 아닐까 싶네요.

    2009/12/05 14:31 [ Permalink : Modify/Delete : Reply ]

비평2009/09/05 09:59

2009년 8월 28일, “20대의 20대에 의한 20대를 위한 Cool & Sexy 페스티발”이라는 모토를 걸고 진행된 케이블 채널 M.net의 연간 시상식, <20‘s Choice>가 열렸다. 이때 인디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이 Hot 챌린지 상이라는 것을 수상했다. <20‘s Choice> 라는 시상식 자체가 20대들의 ’워너비‘ 스타들을 뽑는 시상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주류 대중문화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수상은 그 자체로 뉴스거리가 아닐 수 없었는데, 특히 장기하는 수상의 변을 통하여 “혹독한 취업난과 불확실한 미래가 공존하는 20대”를 이야기하면서 20대들의 현실적인 고민들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풀어냈다고 한다. 상당히 트렌디한 성격의 시상식인 <20‘s Choice>에서 장기하를 수상자로 선정했다는 것에서 이러한 20대들의 불안정한 현실을 다루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트렌드‘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주1)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짚고 넘어가자면 ’88만원 세대‘ 담론이 통속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장기하가 그 아이콘으로 급속히 떠올랐다는 사실과도 무관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장기하의 가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가사들이 오늘 날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을 얻은 20대들의 현실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 날 20대들은 케이블 채널을 보고 온라인 게임을 즐기며, 또 웹서핑을 하면서 그냥 '별일 없이' 살면서 '하루하루 즐거웁게' '매일매일 신나게'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뭐 한 몇 년간 세숫대야에 고여 있는 물 마냥 그냥 완전히 썩어가지고 이거는 뭐 감각이 없어'라고 생각하고, 또 무언가 해볼라치면 '해가 뜨기도 전에 지는 이런 상황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미심쩍음 속에서도 자기계발서와 ‘어른’들의 훈수에 따라서 가라는 대로 갔더니 '여긴 아무 것도 없' 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된다. 그리고 ‘남은 것도 없이 텅빈 나를 잠근다.’


장기하가 묘사한 대로 살아오던 20대들은 우석훈/박권일의 책인 <88만원 세대>가 나온 이후 드디어 하나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88만원 세대'. 그러나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세대담론을 유행시킨 ‘88만원 세대’ 담론은 그 유행만큼이나 주장 자체가 가지고 있었던 어떤 ‘급진성’을 잃어버리고 무력화되고 말았는데, 그 과정에서 ‘88만원 세대’라는 말은 마치 수년 전 시트콤을 통해서 유행했던 ‘청년 실업 40만’과 같은 상투어로 전락해버렸다. 심지어 “88만원 세대라고 하지만 깜빡이가 있기 때문에 저는 취업에 자신 있어요!”라는 광고 카피마저도 등장한 참이다. 이는 ‘88만원 세대’라는 '비참한' 세대 규정이 그 스스로 정말로 ‘비참’해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게다가 '88만원 세대' 담론이나 이와 연결되는 ‘장기하’의 유행에 대해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단 20대들이 사실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88만원 세대’와 거리가 있는, 그리고 ‘루져 감성’을 소비할 뿐인 '먹물'먹은 대학생들이라는 사실 자체가 자괴감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이들의 속내는 사실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정말로 내가 한 달에 88만원 벌면서 살 것 같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는 88만원 세대다! 윗 세대가 짜놓은 불합리한 구조에 분노한다!”(주2) 정작 정말로 ‘88만원 세대’의 운명에 처해있는 20대들은 지금 그저 케이블 채널과 온라인 게임에, 혹은 DCinside를 통해 낄낄거리고 있지 않을까. 이들이 ‘88만원 세대’ 담론과 만나게 되는 지점은 기껏해야 지금처럼 속류화된 ‘위기론’의 대상이 되고나서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러한 부모님의 재촉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너희를 두고 88만원 세대라잖아! 너도 한 달에 88만원 벌고 살고 싶어? 토플학원은 등록했니?"


무엇보다도, ‘88만원 세대’라는 개념 자체가 20대들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우석훈/박권일이라는 (기성세대의) 저자에 의해 외부로부터 만들어진 세대담론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러한 실패를 내재하고 있지 않았을까. 우리 20대들은, 우리 20대들의 머리와 입으로부터 20대들을 규정하고, 또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무언가를 발명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진정으로 열어야 할 것이, “20대의 20대에 의한 20대를 위한 Cool & Sexy 페스티발”에 그친다면 너무나 슬프지 않은가.


그러나 이 것이 어려운 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20대들에게 부재한 ‘역사적/사회적 감수성의 부재’의 문제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한 세대의 역사적/사회적 감수성을 뒷받침해주었던 것이 ‘문학청년’들이였다면, 오늘 날에는 이러한 ‘문학청년’들이 존재하지 않을 뿐 더러, 혹 존재한다고 하여도 이런 것을 상실한지 오래다. 물론 오늘날에도 ‘독서광’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이 읽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예를 들어, 오늘 날 한국의 많은 젊은 ‘독서광’들을 거느리고 있는 박민규의 소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 “치기 힘든 곳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는 루져 감성의 확대 재생산(팍팍한 현실 속에서, ‘경쟁’에서 벗어나 삼천포로 빠져서 웃을 수 있는 여유?) 이외의 무엇을 보여주는가? 세상을 되돌리는 Reset 버튼의 존재(<핑퐁>)는 실은 ‘나’의 내면 말고는 어떤 '외부‘도 존재하지 않는 20대들의 ’상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지? 오히려 블로그들을 통해서 숱하게 만날 수 있는 ’박민규스러운 문체‘들은 박민규의 작품이 어떤 식으로 ’유행‘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처절한 사례가 아닐까.. 이미 문학이 우리에게 어떤 역사의식을 담보해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어렵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과연 무엇으로 오늘 날의 20대들이 어떤 사회적 자각을 이루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만들어 내겠는가? '스크롤의 압박'이라는 단어는 이미 어떤 '텍스트'가 우리에게 무언가 의미를 주는 도구일 수 없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영상물 - 특히 오늘 날 일각에서는 또 다른 '텍스트'로 평가 받는 '영화' - 에 큰 기대를 걸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작품’이 ‘비평’을 통해 의미를 얻는다고 할 때 당장 <씨네21>의 정신분석을 원용한 영화 비평들만 보더라도 도대체 이 것에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는 ‘20대’들이 얼마나 될지 당혹감을 감출 수 없게 된다. 이미 영화라는 것은 일부 매니아들의 취미 영역에 갇혀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우리는 어떤 방법을 통하여 20대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또 우리 세대를 재규정할 수 있는 ‘목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것에 대해서 명확한 무언가를 제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최근 들어 좀처럼 읽지 않고, 좀처럼 쓰지 않고, 무엇보다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20대들이 무언가 ‘행동’에 나선 두 가지 사례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같은 사례들이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제공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두 사례 모두 우리 세대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문화 산업과 관련된 ‘행동’이라는 점에서, 우리들이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이름 아래 연대할 수 있는 시발점은 ‘문화 산업’을 그 타겟으로 한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첫 번째 사례는, 인기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의 멤버 중 세 명이 전속 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낸 전속 계약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동방신기 팬덤의 반응이다. 전형적인 연예인 - 소속사 사이의 계약 갈등으로 보였던 이 문제는, 동방신기 팬덤의 발빠른 행동으로 인하여 한국 연예매니지먼트 사업 전반에 대한 문제 제기까지 확산 되고 있다. 그 어떤 분야보다도 수동적인 대중 문화 소비자의 전형이었던 아이돌 팬덤이 그 행동 주체가 되었기 때문에 더욱 흥미로운 사건인데, 상황이 벌어진 초반에는 단순히 네이버 검색 순위를 올리거나 게시판 말머리를 [SM불공정계약반대]로 통일하는 정도의 대응에 그쳤던 동방신기 팬들은 어느새 동방신기에 대한 대중 여론을 환기하기 위한 신문 광고를 내기까지 했다. 8월 21일 한겨레 신문 1면 하단 광고로 나간 이 광고의 내용은 동방신기의 불합리한 노동 여건을 강조하며 불공정 계약 내용을 성토하는 것이었다. 동방신기 팬들은 이 신문광고를 통해 몇 가지 고무적인 ‘센스’를 발휘했는데, 일주일 전(8월 14일, 일간 신문 포커스)에 실렸던 광고가 단순히 동방신기를 응원하는 팬클럽의 메시지를 담았다면, 이번 광고는 ‘동방신기’를 강조하기 보다는 먼저 말도 안 되는 계약 조항들을 제시하고, 동방신기가 이런 계약 조건 아래서 일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방식으로 아이돌 팬덤 광고에 대한 대중들의 막연한 편견을 수정하는 계기를 보여주었고 할 수 있겠다. 그 뿐 아니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사흘 후에 광고가 나갔기 때문에, 동방신기 팬들은 이러한 분위기에 맞추어 추모 문구까지 함께 광고에 삽입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뜻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멘트는 단순한 추모 문구였다기보다는, 대중문화를 사랑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을 환기 시키며 추모 분위기와 함께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하려는 함의를 담은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더 놀라운 것은, 동방신기 팬 대표들이 12만 명의 서명을 받은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에 제출했다는 것이다. “피진정인 SM엔터테인먼트와 피해자 동방신기의 전속계약서는 전반적으로 불공정성을 넘어 반사회적인 장기 노예 계약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인권침해계약서”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이 진정서는 단순히 동방신기 문제를 떠나서, 연예인 - 전속 기획사 사이의 불공정한 계약 전반에 대해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주3) 이와 같은 진정서 제출은, ‘미성년자 때 맺어진 불합리한 계약 때문에 어린 청년들이 혹사당하고 있다는 인권의 문제’를 제시함으로, 동방신기 문제가 단순히 ‘돈 문제에서 번진 갈등’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아이돌 팬덤의 행동이 기획사 문전 시위에 그쳤던 몇 년전과 비교했을 때 이는 상당히 영리한 행동이 아닐 수 없고, 또 그만큼 성숙해지고 조직력을 갖추게 된 팬덤 문화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것이다.


두 번째 사례 역시 ‘팬덤’의 활동인데, 그 분야는 바로 e 스포츠이다. e 스포츠 스타 리그에 새로 도입된 ‘FA(자유계약) 규약’에 대한 스타리그 팬들의 반대 행동이 바로 이번에 살펴볼 사례다. 프로 스포츠에서 FA란 본래 특정 팀에서 계약이 만료된 선수가 자신의 의사에 비추어 다른 팀과 자유롭게 계약하고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규약이다. 그러나 e 스포츠 협회(Kespa)에서 새로 도입한 FA 규약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선수 본인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 FA인데, e스포츠 FA는 선수 본인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고 협회가 일시적으로 계약 만료 선수의 전권 위임자 격이 되어, 가장 많은 계약금을 제시한 팀과 무조건적으로 선수와 협상권을 주는 방식이다. 게다가 심지어 협상이 결렬되면, 선수는 다른 팀과 협상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원 소속 구단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계약 조건에 합의하지 못한다면, 바로 1년 동안 선수 자격을 박탈당한다! e스포츠 협회의 FA 규약은 선수들의 권리를 전혀 보장해주지 않고, e스포츠 구단들의 사전 담합으로 인한 불공정 계약을 방지할 수 없다는 큰 맹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FA 규약에 대해서 e스포츠 팬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선수 보호의 측면이나 선수 개인의 경력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일이니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e스포츠 협회의 이러한 만행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이미 2 년 전 e스포츠 협회는 게임 방송국에 스타리그 경기 중계권료를 요구하여 문제가 된 적이 있는데,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 대해 아무런 저작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협회’가 게임 방송국에 중계권료를 요구해, 팬들의 시청권을 방해했다는 점에서 팬들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건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문제는 잘 해결이 되었지만, 지금의 FA 사태는 그동안 팬들이 참아왔던 분노를 터트릴 수 밖에 없는 계기가 된 것이다. e스포츠 팬들은 ‘e스포츠를 지켜보는 눈(이지눈)’(주4)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불합리한 FA 규약에 대한 반박과 함께 단순히 FA 규약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e스포츠가 프로 스포츠에 걸맞는 제도를 갖출 때까지 팬들의 감시를 늦추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앞으로 공정거래위원회나 언론지상을 통해 e스포츠협회에 대한 전방위 압박에 나설 것이라는 주장이다. ‘팬’들의 자기 주장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위 두가지 사례는 문화 산업의 ‘소비자’ 입장에서 수동적인 태도를 보일 수 밖에 없었던 팬 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상징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세대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아이돌’과 ‘e스포츠’라는 영역에서 이러한 사건들이 동시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 아닐 수 없다. 나는 팬들의 이러한 ‘분노’가 우석훈/박권일이 ‘88만원 세대’를 이야기하면서 막연히 요구했던 '우리 세대가 짱돌을 드는 법'을 하나하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막연히 '짱돌을 들고 바리케이트를 쳐라'라고 한들, 일상 속에서 별 일 없이 살아온 우리들이 갑자기 짱돌을 들고 바리케이트를 칠 방법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짱돌이 뭔지도, 바리케이트를 어떻게 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그 '방법'을 배우는 일이다. 지극히 개인화된 우리가 어떻게 ‘연대’하고, 또 '사회'에 대한 태도를 취하고, 어떻게 ‘개입’하는지 하나하나 배워 가야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잠깐 대표적인 운동권 레퍼토리인 '어리버리한 대학 신입생이 선배의 손에 이끌려 철거촌에 가게 되었을 때의 충격'을 떠올려보자. 그러한 최초의 '충격'에서 부터 신입생은 (많은 의미에서) 투사로 거듭나게 된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 세대에게 이러한 '충격'은 사라진지 오래다. 그런 광경은 이미 TV에서 수없이 보아 왔고, 너무나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철거촌 문제’는 단순한 사회적 풍경으로 나에게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는 무정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자 이야기>나 <에덴의 동쪽> 같은 드라마나, 심지어 <무한도전>(주5)에서도 우리는 철거촌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게 된다.) 나는 오늘날 동방신기 팬덤이나, e스포츠 팬들에게 닥친 ‘충격’이 이전 세대 대학 신입생들의 그것에 대응할 만한, 오늘 날 20대들에게 사회적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아이돌 팬들은 기획사와 아이돌 그룹 사이의 계약 조항이 불공정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단순히 이러한 불합리한 종속 관계에 대하여 ‘알면서도 크게 이야기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암묵적으로 공유되던 그러한 룰이 누구보다도 영향력이 큰 아이돌인 동방신기에 의하여 깨지는 사례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동방신기를 통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을 누리고 있던 동방신기 팬덤은, 이러한 '충격'에서부터 이제까지 기획사에서 제공되는 아이돌의 이미지들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던 입장에서 벗어나서, 자신들이 정말로 아이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나하나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이돌에 대한 응원 구호나, 팬클럽 풍선 색깔마저도 기획사에 의하여 일일이 지정받던 수동적이고 소비적인 팬 문화가 새롭게 바뀌어 나갈 수 있다는 기대감을 안겨주는 사건이다. e스포츠 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아이돌 팬덤과 같은 나름의 ‘역사’와 ‘조직’이 부재한 e스포츠 팬들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앞으로의 ‘운동’은 참으로 어려운 길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시작의 깃발을 세웠다는 점에서, 이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참조될 좋은 선례을 남겼다는 의미가 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방신기 팬덤이나 e스포츠 팬들은 분명히 그들에게 ‘주어진’ 대중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대중’에 불과했지만, 지금 이들은 각자가 누리고 있는 문화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충격’을 통해서 스스로 논쟁하고, 행동을 결정하고, 또 문화산업의 불합리한 관행에 대해 ‘경고’를 보내고 있다. 이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떠나서, 적어도 ‘별 일 없이’ 살다가 ‘감각이 없어'진 후로 ’나를 잠근‘ 개개인들이 ’팬‘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주6)으로 공통의 목적 아래서 ’연대‘하고, ’발언‘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화산업의 영역에서 나타난 ’팬덤의 정치화‘ (주7)현상이 다른 영역까지 확대되어 나갈 수도 있다는 기대는 물론 섣부른 것이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그러한 기대를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할 일들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내가 동방신기에 관심이 없고, 또 스타 리그에 관심이 없을지라도 이처럼 ’우리 세대의 영역들‘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우리 세대의 목소리‘를 짜내기 위한 준비 절차라 할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지금 싸우고 있는 그들과 ’연대‘하라. 그 것이야말로 우리들이 가장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우리 세대의 실천‘이 아닐까.


주1) 엔터테인먼트 웹진 텐아시아에 실린 위근우 기자의 프로그램 소개를 빌려보자.

“20대의 감성을 대표하는 대중문화 시상식을 표방하는 가 생방송으로 중계된다. 기자, 잡지사 에디터, 동호회 운영자 등 소규모 트렌드 세터 50인이 후보를 선정한 뒤 20대에게 한정해 설문조사를 하는 과정을 통해 수상이 결정되기 때문에 동시대의 감성에 근접한 수상 결과를 예상해볼 만하다. 이효리, 타블로, 장기하 등이 행사를 이끄는 메신저로 등장하는데 특히 장기하의 경우 20대의 취업난에 대한 불안을 담은 공연으로 마냥 화려하기보다는 20대의 공감을 이끌어낼 예정이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재벌 2세 구준표 역을 맡은 이민호가 핫 드라마 스타 부문 후보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20대 루저들의 현실과 그들이 응원하는 스타의 이미지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인 듯하다. 어쩌면 그 괴리야 말로 20대의 가장 큰 특권이자 괴로움이지 않을까. ”

주2) 이는 장기하라는 아이콘을 통해 ‘루저 감성’을 소비하고 있는 20대들의 반응과도 정확히 연결된다.
캐즘의 블로그(http://blog.jinbo.net/chasm/?pid=106)

“"장기하"라는 아이콘은 지금 20대 상층부들의 모순된 욕망을 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루저의 감수성을 소비할 수는 있지만, 실제 루저가 되기는 싫다"는 욕망 말이다. 사회 전반에 강화되는 경쟁의 논리 속에서, 경쟁에서 한 발 물러나거나 경쟁에 목매달지 않겠다는 루저의 감수성을 소비하는 행위는, 경쟁의 압박을 잠시 완화시켜주며 심지어 "쿨"하다는 평까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루저가 되어 경쟁의 장 자체에 참여도 하지 못해서는 "찌질하다."(혹은 반대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실제 루저가 아닌 한에서만, 루저의 감성을 소비할 수 있다.)”

3) 이 진정서 중 5번 항은 아예 동방신기 문제와 분리되어 ‘인권의 사각지대에 선 연예인 전속 계약‘을 이야기하고 있다.

4) http://eznoon.tistory.com

5) 오마이뉴스의 6월 22일 기사 - <무한도전> '여드름 브레이크' 상금 300만원, 사실은... - 참조. 무한도전 촬영 장소였던 회현 시민(시범) 아파트, 연예인 아파트, 오쇠동 마을이 철거 위협을 당하고 있는 장소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6) 젊은 세대의 연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정체성은 ‘88만원 세대’와 같은 경제적 계급 의식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88만원 세대’라는 모토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불안감으로 오히려 20대들 스스로를 옥죄게 되었고, 사실 현재적으로 부모의 지원 아래서 절실한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살고 있는 20대들이 그러한 ‘의식화’를 이루기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차라리 제각기 다양한 문화적 취향과 코드를 가지고 살고 있는 20대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의식화’의 시작점으로 삼는게 어떨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7)한국 정치에서는 2002년 대선을 기점으로 ‘정치의 팬클럽화’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역으로 ‘팬클럽의 정치화’라는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팬클럽이야 말로, 젊은 세대가 가장 활발히 참여하고 있고, 또 조직적인 측면에서 활력을 지니기도 한, 우리 세대의 ‘시민단체’와 다름 아니다. 이미 다양한 아이돌 팬덤들은 기성 사회단체에 못지 않게 기부와 봉사 문화를 실천하고 있기도 하다.

2009/09/05 09:59 2009/09/05 09:59
Posted by 프리스티

Leave your greetings.

  1. 프리스티

    빌어먹을 사지방 바이트 제한!!!

    2009/09/05 10:05 [ Permalink : Modify/Delete : Reply ]

비평2009/07/05 20:08



1.


 전 나름 이런저런 음악에 청각을 곤두세우며 살았던 고교 생활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재수 학원이나 대학 생활을 통해 만나게 된 친구들은 저에게 이제까지와 다른 음악의 신기원을 소개해주었습니다. 저는 이들을 통해 하드락과 펑크에 인이 박혔던 딱딱한 제 귀를 말랑말랑하게 녹여준 새로운 음악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죠.


 학원의 분반이나 대학의 과반과 같이 구성원 모두가 처음 만나게 되는 집단 내에서 서로가 친해지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미니홈피, 혹은 블로그 순례가 되겠죠? 저 역시 친구들과 미니홈피/블로그 순례를 통해서 친해지게 되었고, 특히 서로의 공간에 새겨져 있는 문화적 경험의 흔적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면서 그 것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미니홈피를 방문하자 마자 접하게 되는 BGM들은 그 사람의 음악적 취향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면서 그 사람에 대한 첫 인상을 결정하게 되는 수단이 되었던 것 같아요.


 이처럼 BGM은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쉽게 들을 수 있고 자신의 미니홈피나 블로그를 찾는 사람들에게도 노래를 알릴 수 있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음악적 취향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미니홈피/블로그의 다른 컨텐츠들과 합산되어 문화적 감수성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척도가 되기도 하죠. BGM은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교양 있고 멋진 사람으로 보이고픈 스노브들에겐 자기 치장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전국민의 상식 사이트 네이버 지식인에 '싸이 BGM'으로 검색해보세요. '좀 있어보이는' 노래들의 목록이 주룩 뜹니다. 음악이 좋아서 BGM으로 걸기 보다는 BGM으로 걸기 위한 음악을 탐색하는 시대가 온거죠. 그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BGM病에 걸린 음악 소비 형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뭐, BGM으로의 인기를 토대로 더 많은 영미 인디팝들이 국내에 라이센스되는 좋은 결과를 내기도 하긴 합니다만,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쉽게 가치판단을 내리기가 힘들군요. 결국 '리스너'들의 계보도 조금 다른 방법을 거치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스스로의 스노브적 속성을 따라 이어져 온 것이라고 볼 수 도 있겠으니까요.

 아무튼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다른 음원 컨텐츠에 비해서 BGM 시장은 훨씬 빠른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대중음악 시장에서 BGM이 차지하는 비율은 40%에 이릅니다. 소녀시대의 Gee 같은 노래는 무려 100만 개 이상의 BGM 판매 수익을 보여주며 단일 곡 최다 BGM 순위에 랭크되기도 했는데요, 말이 100만 개지 전국민이 5천만인 나라에서 정말 엄청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BGM 판매가 한국 대중 음악 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겠지요.


 BGM 시장이 매년 가파르게 성장세를 보이는 것과 달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정작 음반 판매 시장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2000년도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밀리언 셀러'가 심심치않게 보였지만, 이제는 100만장은 커녕 30만장을 넘기는 앨범을 찾기도 힘든 상황이 왔죠. 음반 시장과 디지털 음원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글에서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을 피하도록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BGM과 음반 판매 시장의 규모가 반비례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인디 음악들은 양쪽 시장 모두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며 선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유명 아이돌 그룹의 음반 판매량 보다 인디 밴드의 음반 판매가 앞서는, 이른 바 '대중성, 상업성'에서 더 뛰어난 결과를 보여주는 아이러니한 모습도 등장하고 있지요. 일례로, 올 해 상반기 음반 판매 순위의 상위권을 '인디'로 분류할 수 있는 장기하와 얼굴들, 브로콜리 너마저 등이 차지하기도 했지요.  이는 주류 음악 시장의 총체적인 부진이 그 원인이기도 하지만, 점차 인디 음악을 향휴하는 소비자들의 범주가 확대 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주 원인은 바로 BGM 시장의 등장 때문이구요.


 앞서 말했뜻이, BGM은 미니홈피/블로그 주인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도구죠. 마케팅의 관점에서 요즘 세대를 분석할 때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스타일에 대한 강박증'입니다. 이는 핸드폰/디카 등 주로 젊은 세대를 겨냥한 CF들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 '스타일'이라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죠. 그리고 그 '스타일'은 기본적으로 마이너리티를 추구하는 개념입니다. 스타일의 사전적 정의가 '문체, 필체, 말씨, 어조, 독자적인 표현법'임을 유의해야합니다. '독자적'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누구나 다 향유하는 주류 문화에서 탈피해야겠죠. 이런 경향이 BGM 선택에 반영되었기 때문에, 인디 음악 애호가 확산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2.


 물론 이러한 인디 음악 팬들이 어디선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90년대 후반부터 두드러진 '홍대 음악'의 인기가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 여기서 말하는 '홍대 음악'은 거칠게 분류해서 두 가지로 볼 수 있겠습니다. 펑크/하드락 계열, 그리고 모던락/일렉트로니카 계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양대 진영은 모두 각각의, 그리고 어느 정도 교집합이 존재하는 팬들을 거느리고 있었죠. (디씨 같은 곳에서 쓰이는 저질스러운 - 그러나 어느 정도 통찰력 있는 - 명칭으로 이들은 각자 메탈돼지, 브릿게이로 불립니다. 크크.)


 90년대 후반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홍대 음악은 유희열, 김동률, 이적, 윤상 등등의 '뮤지션'들과 영향력을 주고 받으며(이때 '뮤지션'이라는 표현은 아이돌/댄스 가요 위주의 기획사 음악과 대립항으로 등장했지요) 그 수요를 키워나갔습니다. 성공적으로 주류 음악계로 진입하는 사례들도 등장하구요. 뿐 만 아니라 2000년 하드코어 성향의 솔로 2집을 내면서 화려하게 컴백한 서태지는 그 자신의 브랜드 파워 만으로도 2백만장이 넘는 음반 판매량을 보여주면서 대중 음악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서태지의 성공은 주류 음악계에 새로운 장르 시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이 즈음부터 연예기획사에서 '아이돌 락 밴드'라는 새로운 실험을 시도하게 됩니다.) 기존의 홍대 음악 씬에는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 위기감이 표출 되었던 것이 안티 - 서태지를 표방한 펑크 씬의 문사단 활동이었고, 그 기회라 할 수 있는 것은 서태지 팬덤을 비롯한 새로운 음악 팬들이 인디 음악 시장에 유입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인디 음악의 팬층 역시 더욱 넓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인디 음악 팬들의 존재가 확실하게 각인 된 것이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을 비롯한 몇몇 문화적 이벤트들의 성공이었습니다.


 펜타포트나 다른 락페들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기획 의도의 이면에 무엇이 작용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다, 는 것이 기획자 측의 의도겠지만, 이러한 순수한 의도만으로 락페를 열만한 자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죠. 일례로 2000년 부터 2003년 무렵까지 진행되었던 TTL 콘서트는 아직 페스티벌 문화가 언론 매체에 주목 받기 이전부터 음악 팬들을 결집시켰던 선구자 격의 음악 축제였습니다. 많은 인디 락 - 힙합 뮤지션들이 참여했던 이 콘서트는 그 이름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SK 텔레콤이 10~20대들을 상대로 서비스하던 TTL 요금제의 홍보용 콘서트였습니다. 그리고 인디락/힙합은 TTL 서비스가 목표로 하던 '젊음, 열정, 새로움' 따위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하여 선택된 수단이었구요. TTL 콘서트가 과연 SK텔레콤의 기대만큼 홍보 효과를 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TTL 콘서트라는 것이 열렸다는 것으로 우리는 이미 2000년 경부터 기업 자본이 인디 씬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수익 모델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펜타포트는 인디 씬이 가지는 이미지 뿐 아니라 인디 음악 시장 자체가 기업 자본에 의해 포획되었던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펜타포트는 M.net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죠. 그리고 m.net은 단순한 음악 채널이 아니라, 거대 자본과 미디어 지배력을 기반으로 종합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이끌고 있는 CJ 그룹 계열사입니다. 단순히 음악 시장에만 한정하더라도, 엠넷미디어는 이미 국내 음원 시장의 30%를 장악한 거대 기업이죠. 이러한 m.net이 펜타포트와 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이미 포화상태에 이른 주류 대중 음악 시장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한 인디 음악 시장의 외연 확대롤 노렸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인디 음악 시장을 띄우려는 이러한 시도에 디지털 음원 시장의 폭발적인 확대가 더해져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그랜드민트페스티벌(GMF)입니다. GMF는 TTL 콘서트를 후원했던 SK텔레콤(싸이월드)와 펜타포트를 후원했던 CJ그룹(엠넷)이라는 두 거대 자본이 만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음원을 서비스하는 주된 플랫폼인 모바일음악/미니홈피/블로그를 장악하고 있는 SK텔레콤과, 이 때 디지털 음원을 만들어 내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체인 CJ그룹이 GMF와 같은 인디 음악 축제를 열었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게다가 GMF가 표방했던 '도시형 감성 페스티벌'이라는 슬로건은 이제까지의 락페들이 조금은 빡 센 '형님' 뮤지션들을 주로 무대에 올렸던 것과 달리, GMF가 그야말로 인디 계의 '언니, 오빠'들로 무대를 꾸미는 것에 적합했죠. 이는 같은 인디 음악이라고 해도 펑크/하드락 보다 모던락/일렉트로니카 계열의 음악들이 훨씬 시장에서 선호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호도의 차이는 후자의 음악들이 BGM으로 더 적합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구요.


 저는 겉보기에는 자본의 논리와 무관해보이는 인디음악이 실제로는 락페라는 수단에 의해 점점 자본에 의해 포섭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우려를 느끼게 됩니다. 물론 지금까지는 인디 뮤지션 당사자들이 직접적으로 기업의 영향력 하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인디 음악이 '기획사 음악'에 비해 창작의 획일화나 문화적 퇴행에서 자유로운 입장에 서 있지만, 인디 뮤지션들이 대중들에게 널리 소개되는 계기가 주로 락페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앞으로 인디음악씬이 지금과 같은 창작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되기도 합니다. 작년 한 해 동안 기획사음악이 디지털음원시장에 맞춘 '후크 송'으로 획일화 되었던 것 처럼, 인디음악 역시 언젠가 '간지 BGM스타일'로 획일화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죠. 그러면 더 이상 인디를 인디라고 부르기 애매해지는 상황이 오게 되겠죠?


 뿐만 아니라 음반 판매 시장의 지속적인 부진이 어쩔 수 없이 대중 음악시장의 수익 구조를 디지털 음원으로 한정짓게 되는 현 상황 역시 인디씬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현상으로 보입니다. 물론 장기하나 브로콜리너마저 처럼 음반 판매 + 공연 수익 기타 등으로 창작 활동을 유지할 수 있는 밴드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른 바 ' 스타 급' 뮤지션들 중에서도 음반 판매로는 겨우 수지나 맞추는 수준인 사람들이 적지 않죠. 일부 뮤지션들의 디지털 음원이 불티나게 팔리긴 하나, 다들 알다시피 디지털 음원의 수익 분배 구조는 뮤지션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구성되어있습니다. 컬러링 같은 경우는 하나 팔릴 때 마다 이동통신사가 50%, 작곡,작사가가 8%, 가수,연주자가 4%, 음반기획사가 19%, 컬러링 업체가 19%를 가져갑니다. 하나에 700원이라고 치고, 작곡작사연주를 뮤지션들이 도맡아 하는 인디 음악의 속성을 고려한다면 컬러링이 하나 팔릴때마다 뮤지션들에게는 70~80원이 겨우 떨어지게 되는 거죠. 십만 명이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를 컬러링으로 쓴다고 해도, 장기하에게는 꼴랑 800만원이 돌아가는 꼴입니다. 뮤지션도 뮤지션이지만, 인디 기획사들도 이러한 점에서 조건이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락페스티벌을 주관하는 SK텔레콤 같은 이동통신사가 디지털 음원 수익의 50%를 가져가는 판이니, SK텔레콤의 관점에서 인디 음악 시장에 대한 투자를 괜히 하는게 아니겠죠.

 4.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인디 음악 씬을 잠식하려는 거대 자본에 대항해 무엇을 해야할까요? 사실 불합리한 수익 분배 구조가 개선되지 않는 한 소비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이러니 저리니 해도 우리가 거대자본이 주관하는 락페를 놀러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좋아하는 노래에 대해 디지털 음원을 구매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구요.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문화 상품을 소비하면서도, 문화 상품의 소비 이면에 있는 불합리한 유통 구조를 바로 인지한다면, 디지털 음원을 사는 것도 좋지만 음반 한 장을 더 사는 것이 인디 뮤지션들에게 더 적극적인 이득을 줄 수 있다는 점, 펜타포트나 GMF도 좋지만 인디 뮤지션들의 클럽 공연도 잊지 않고 챙기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거대 자본이 유도하는 대로 '인디 음악의 이미지/스타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인디 음악 그 자체를 사랑하고 애호할 수 있는 길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일상이 자본의 논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가장 예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음악'입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서 그나마 자본의 논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디 음악' 마저도 거대 자본에 의하여 하나의 시장 창출/마케팅 대상으로 다루어지고 있따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구요. 다음 글을 통해서는 '인디 음악'의 대립항, '아이돌 음악'의 변화 양상을 통해서 대중 음악 시장의 위기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네요. 그리고 그 주제는 당연히 진리의 ★소녀시대★가 되겠지요? 크크. 다음 글에서 다시 만납시다.

2009/07/05 20:08 2009/07/05 20:08
Posted by 프리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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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지훈

    사실 많은 클럽 공연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 협소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라이브의 매력에 흠뻑 빠졌었더랬죠. 그 때 여러 인디 밴드들도 알게 되었고요. 클럽 공연을 한 번 가보면 그 매력에 계속 찾아갈텐데, 처음 가는게 어려운 것 같아요. 아무래도 누구나 홍대 근처에 사는 것도 아니라 접근성도 조금 떨어지고,(홍대 근처말고 인디 밴드들이 꾸준히 공연하는 곳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굳이 찾아가면서까지 음악을 들으려는 사람보다는 그냥 음원에 만족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아무튼 규모가 크든 작든 라이브 공연은 정말 재미있는데....인디음악을 락페같은 행사를 통해 알리는 것보다 소규모라도 인디음악을 라이브로 공연할 수 있는 곳이 더 많아지고 잘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어떤 '인디음악'이 좋고 좋지 않고 떠나서, '인디음악 공연'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가는게 좋을 것 같아요. 너무 이상적인 바람일까요?

    2009/07/07 18:03 [ Permalink : Modify/Delete : Reply ]

비평2009/06/19 00:23
모두가 알다시피 올 해 부터 군인들에게 팔던 면세담배(연초)가 끊겼다.  이미 국가적 차원에서 실시되는 금연 캠페인에 군이 빠질리가 없다. 수많은 흡연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이 조치에 따라 금연 캠페인 역시 강도 높게 시행되고 있다. 월례 행사처럼 찾아오는 금연 강사들, 금연자에게 주어지는 포상 휴가, 금연보조제 지급.. 다양한 방법으로 흡연자들에게 건강에 대한 위기감을 상기시키며 금연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로 담배에 물려있는 높은 세금은 국가의 쏠쏠한 수입원이다. 다들 잘 알고 있듯이 한국 같은 경우는 담배를 국가가 전매하면서 (모든 국산 담배는 KT&G다!) 세수 확충의 주요 도구로 쓰고 있다. 한 편으로 담배를 통해 국가의 세금을 불리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금연 캠페인을 통해 국민의 흡연률을 낮추려는 이중적인 모습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구'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 날 사용되는 인구(population)는 1920년대에 들어서 비로소야 지금과 같은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한 단어이다. 그 이전까지 인구는 인구감소를 뜻하는 depopulation의 반의어인 인구 증가의 뜻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마키아벨리, 몽테스키외 등 근대적 정치 사상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사상가들은  '인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사용했던 단어는 '주민수', 혹은 '인민'이라는 용어였다.


그러나 1756년, 프랑스의 중농주의 경제학자 케네를 시작으로 루소, 데이비드 흄, 아담 스미스, 맬서스 등의 학자들이 '인구'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인구'라는 단어는 여전히 '인구 증가'라는 동적인 개념으로 쓰였던 것이다. 그러나 차츰 '인구'라는 단어는 '인민'이 가진 정치적인 의미(민족국가의 주체적 구성원)가 제거된, 정치단위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인구 증가라는 동적 개념이 사라진 '안정 인구'라는 개념이 정착되면서 오늘날처럼 국가와 연결된 추상적 인구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미셸 푸코는 중농주의에서 출발한 자유주의적 통치 방식이 '인구'라는 통치 대상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 이전까지 이전의 사회에서 인구 문제는 군주와 신민들 간의 관계 문제였다. 그러나 중농주의자들은 군주의 의지에 복종하는 '종속된 의지들', '신민의 총체'로 인구 개념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의지들의 복종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주장했는데, 이 것이 바로 '인구의 자연성'이다.


인구가 가지는 '자연성'이 의미하는 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이다. 첫째, 인구는 군주에게 주어지는 원자재가 아니라, 기후, 영토, 산업 등 현실의 다양한 조건들에 대한 종속 변수다. 이로 인해 군주는 인구를 국가의 재산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경제 정책들을 시행하고, 인구의 상태를 분석하고 계산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둘째, 인구는 저마다 다른 '개인'들의 행동을 통해 발생하기 때문에, 군주는 개인들의 다양한 욕망들을 조정하여 공공의 이익을 창출해야한다. 셋째, 인구의 불규칙한 현상들, 이질적인 현상, 우연적인 것들을 분석하고 통제함으로써 인구의 규칙성을 생산한다. 이를테면 질병을 통한 서로 다른 사망률, 경제적 소득 격차 등이 지역별, 계급별의 사망률과 소득으로 규칙화된다.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전근대 - 중농주의 시기의 '인구'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푸코는 '기근'의 예를 든다. 전근대 사회에서 기근이 발생한다면 지배 군주는 무엇을 하는가? 식량이 부족해졌기 때문에 사재기를 하는 사람이 생기고, 군주는 이에 대항하여 작물을 추수하고 바로 시장에 팔 것을 지시한다. 경찰 권력을 동원해 각 창고를 검사하여 시장의 가격들을 통제한다. 이처럼 권력을 동원하여 사람과 물건들을 '규율'하고, '규범'을 생산한다.


그러나 중농주의자들의 시대는 다르다. 그들의 관점에서 기근이 발생했다는 것은 12달 중 6달 먹을 식량 밖에 없다는 것을 뜻하고, 6달 분 식량을 외부에서 가져오는 방법을 주장한다. 그들은 이를 위해서라면 시장을 개방하고 곡물가가 상승하는 것을 방임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즉 기근이 발생한 순간 가격이 상승하고, 이를 통한 이익을 바라보는 상인들의 교역이 존재해야 곡물 가격이 안정됨과 동시에 사회는 12달 먹을 식량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중농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이는 물건과 사람들을 순환시킴으로써 통치하는 방식을 말하며, 이는 '정상성'을 생산한다.


전근대 국가에는 군주가 자신들의 신민들을 지키기 위하여 구황 작물을 분배하고, 공동체적 규범을 재생산한다. (이를테면 조선 왕조를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농주의자들의 관점에서 국가는 가격상승과 자유무역을 인정해야한다. 국가는 이러한 가격상승과 자유무역의 균형을 지탱하기 위해서(정상성의 유지) 끊임없이 인구라는 요소를 분석하고, 관리하고, 통제해야한다. 중농주의의 시대에 시작된 '국민경제'의 관점이야 말로 '인구'가 가지는 의미를 잘 드러내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산술적으로 증가한다, 잘 알려진 맬서스의 '인구론' 역시 이러한 계기에서 등장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 1920년대에 들어서 '안정 인구'의 개념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인구 수준을 통제해야한다는 생각이 싹 트기 시작한 것이다.이 때는 한 사회의 경제적 복지는 인구 규모와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는 인구론적 경제관이 유행한다. 경제자원(N)=인구(V)·생활수준(L)이라는 공식은 많은 지지를 받게 되었다. N = VL 은 달리 말해서 L=N/V로 정리될 수 있다. 한정된 경제자원을 가지고 사회의 생활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인구를 낮춰야한다는 위험한 발상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아들 딸 구분 없이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오늘 날 한국 인구가 1억이 되어야 국민 경제 단위로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느니, 등의 이야기들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때 부터 각 국가는 정책적 차원에서 인구를 관리 통제하기 시작한다. 이는 각 국가의 경제적 발전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저발전 국가에서는 인구를 줄이려고 노력한다. 1가족 1자식이라는 중국의 인구 통제는 빠른 경제지표적 성장을 추구했던 국가적 기획에서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인구 통제/관리에 의하여 오늘 날 서구 대부분의 국가들이나 동아시아 몇몇 국가에서는 고령 사회라는 문제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제는 역으로 인구 증가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리고 각 국가에서는 출산에 대한 권장 뿐만 아니라 비만, 암과 같은 질병, 흡연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국민들에게 '건강 이데올로기'를 불러일으키면서 개인의 건강 관리를 강조하는 여론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인구 증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건강에 대한 위험을 직시하고, 스스로의 삶을 건강하게 가꾸어나가는 것은 물론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 국가에 의해 개인이 '자유롭게 죽을 권리'마저 박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극단적인 예로, 자살이나 안락사에 대한 국가의 간섭까지 이야기를 뻗쳐볼 수 있겠다.) 나는 오늘 날 펼쳐지는 금연 캠페인의 홍수를 보면서, 내가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국가 경제의 '인구' 단위에 포함되어 계산되고 그에 의해 나 스스로의 자유로운 행동마저 간섭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어떻게 보면 담배를 피우고, 끊는 행위 마저도, '이데올로기적 행동'인 것이다.

2009/06/19 00:23 2009/06/19 00:23
Posted by 프리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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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2009/05/31 20:27

 - 박쥐의 주인공은 현상현 신부다. 제대로 읽어도 현상현, 거꾸로 읽어도 현상현.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부터 이런 식으로 거꾸로 읽어도 똑같은 뜻이 되는 문구들에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다. 현상현 신부의 이름은 그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뱀파이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참고로 또 다른 주인공인 태주의 이름은 박쥐의 원작 소설인 테레즈 라캥에서 따왔다고. 테레즈 = 태주. 라 여사는 '라캥'에서 빌렸다고 한다. 라 여사, 강우, 태주가 살고 있는 행복 한복집. 패륜과 살인의 주요 배경이 되는 이 가게는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역설적인 이름을 쓰고 있다. 행복(한) 복집

 - 박찬욱 감독은 유난히 신체 훼손의 이미지를 즐긴다. 그러나 박찬욱의 그 것은 쿠엔틴 타란티노나 프레디 로드리게스처럼 신체 훼손의 '키치적 미학'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신체 훼손 본연의 폭력/잔혹의 느낌을 극대화 한다.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등에서 등장하는 잔혹 장면들을 떠올려 보자. 그러나 박쥐는 이전 작품들 보다 본격적인 신체훼손 장면은 적은 편이다. 피만 빨아 먹는 우아하고 귀족적인 이미지의 흡혈귀를 소재로 쓰고 있기 때문에? 박쥐에서 가장 인상적인 신체 훼손 장면은 햇빛을 받아 전신이 재로 변해버린 태주의 발목이 뚝, 떨어지는 장면이다. 이제까지의 뱀파이어물을 통틀어서라도 가장 아름다운 마무리로 꼽힐 만한 이 장면은, 장르물을 요리하는 박찬욱의 솜씨가 그저 웰-메이드라는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느끼게 한다.

 친절한 금자씨의 인상적인 오프닝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 처럼 박찬욱은 '피'의 이미지 역시 자주 활용한다. 박쥐는 뱀파이어물인 만큼 피의 이미지를 그 어느 때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실험을 자원한 상현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피리를 불다가 피를 토하고, 피리 구멍 사이로 피가 왈칵 쏟아지는 장면은 인상적인 각혈 장면이다.

 - 상현과 태주, 라여사의 기묘한 동거는 자연스럽게 프로이트를 떠올리게 하는데, 뱀파이어가 되고 나서도 사제로서의 도덕과 양심에 따라 스스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는 상현이지만, 본능적 충동에 솔직한 태주(이드)에게 끌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에고). 태주의 폭주에 갈팡질팡하는 상현이지만, 무력한 라 여사의 시선(슈퍼에고)에 가까스로 스스로를 붙잡게 된다. 전신이 마비된 라 여사를 앞에 두고 거리낌 없이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 태주가 오아시스 멤버들을 살육하자 끊임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태주를 저지하는 상현, 자동차 안에 라 여사를 앉혀두고 태주와 함께 산화하는 상현. (근데 라여사는 어떻게 되는 걸까? 태주의 피를 섭취한 라여사가 뱀파이어가 된 박쥐 2가 나오려나?)

 - 일반적인 '종교영화'로 보기에는 박쥐에서 드러나는 종교적 고민은 너무나 나이브해 보인다. 신앙과 인간적 욕망의 갈등은 수없이 많은 종교 영화에서 변주되온 주제이기도 하다. 나는 사제라는 설정 자체가 뱀파이어라는 소재를 더욱 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로 박찬욱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 어떤 인간 보다도 욕망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의 뱀파이어(들)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사랑과 욕망은 얼마나 거리가 있는 것일까?

 행복한(복)집에 같혀 살아온 태주에게 갑자기 나타난 상현은 처음에는 단지 욕망을 배출해낼 탈출구에 불과했다. 상현에게도 태주는 그저 욕망의 대상(그 것이 성적 욕망이든, 아니면 휴머니즘적 만족이든)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욕망의 구속구(라 여사, 강우)들을 떨쳐낸 태주가 다른 남자와 다섯 번 섹스하고도 무언가 결여를 느끼면서 터덜터덜 걸어올 때, 태주의 폭주를 견디지 못한 상현이 태주를 목졸라 '죽일' 때(사랑은 자신이 자기라고 느낄 수 있게 만들었던 것들 - 이를테면, 상현이 끝까지 포기하려 하지 않았던 휴머니즘? - 에 대한 적극적 파괴다!),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함께 죽음을 택할 때 둘의 이야기는 그 무엇보다도 적극적인 로맨스로 전환된다.

 박찬욱은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만들면서 상업적 성과나 예술성에 대한 지나친 중압감 없이 시도한 첫 영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복수 '삼부작'이라는 명칭은 얼마나 부담감을 안겨주는가!) 정신병자들의 이상한 사랑을 다룬 '멜로'영화인 사이보그..가 그의 '첫' 영화라면, 박쥐 역시 그 연장선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박쥐는 범죄/종교/멜로/판타지라는 다양한 장르를 변주하고 있지만, 그 서사 구조가 유난히 뚜렷하게 드러나는 장면들은 바로 멜로물의 그 것이다. (사실, 박쥐는 얼마나 헐거운 구조로 이루어진 영화인가? 그 것이 의도적이라면?) 세상에서 배제된 단 둘이 맨 몸으로 세상이 멸망하는 새벽을 맞이하는 영화인 사이보그.. 와, 세상을 배제시켜버린 단 둘이서 죽음을 맞이하는 아침을 그린 영화인 박쥐는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는지!

2009/05/31 20:27 2009/05/31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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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민규

    밖에 나온 주제에 아직도 <박쥐>를 못 보고 있는 저로서는, 흑흑. 여간 인상적인 것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박감독이 분방하게 열어두고 있다는 점이 아닐지요. 조만간 어떤 방식으로든 찾아 봐야겠습니다.

    2009/06/01 13:40 [ Permalink : Modify/Delete : Reply ]

비평2009/05/31 17:50
점심을 먹다가 TV를 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소환조사와 관련한 보도가 나온다. 뉴스는 봉하마을에서 서울지검까지, 몇 대의 차량이 동원되고 몇 명의 취재진이 따라붙으며, 심지어 저녁은 곰탕이나 설렁탕이 나올 예정이라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알려준다. 어제 있었던 재보궐선거에 대한 뉴스도 나온다. 선거 결과에 따라 각 당 대표들의 거처가 어찌될 것인지, 무소속으로 당선된 정치인들이 과연 복당할 것인지, 친박계가 친이계를 압박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든지.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뉴스를 보면서 점심을 먹던 사람들끼리 오랜만에 '정치 이야기'가 나온다. 과연 노 전 대통령이 직접 돈을 받았을까? 정치권의 자금 흐름은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일까? 드라마 <남자 이야기>처럼 리얼한 부패와 비리의 장면들을 파헤쳐 보고 싶다, 는 등의 이야기. 모 정당이 5-0 대패를 당했다느니, 모 당은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나왔다는 등의 이야기도 나온다. 정치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간다. 정치는 부패와 비리의 영역이며, 삼국지 게임의 땅따먹기처럼 의석 싸움이 벌어지는 곳이다. 무엇보다도 나와 유리된 가상의 공간으로 여겨지고, 논해진다.


 이와 같은 '정치 이야기'는 정치의 풍경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의민주주의의 기반을 이루는 정당 정치는 마치 폭력조직들의 세력 다툼처럼 여겨지기 십상이다. 각 정당은 각자의 지역적 기반(나와바리)를 토대로 국회(전국구) 의석을 획득한다. 그리고 5년에 한번씩 대통령(통합 보스)을 선출한다. 각 정당(조직)들의 정책과 이념들은 단순히 세 다툼을 위한 도구(사업)로 쓰여지는 것'처럼' 여겨진다. 유독 비리와 부패를 선정적으로 보도해대는 언론 매체들은 정치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환상을 만든다. 정치는 곧 권력과 돈을 향한 지난한 투쟁과 다를 바 없다.


(사실 현실 정치의 실체가 그와 다를바 없을지라도) 정치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인식은 '민주 공화국'이라는 정체성에 강렬한 위기를 불러온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국민들 스스로 이러한 '권력 행사'를 단순히 자신들과 유리된 '정치'의 영역으로 생각할 때, 그리고 그 정치를 권력과 돈, 부패와 비리라는 이미지로 어둡게 매듭 지어놓을 때 '현실 정치'는 그때야말로 자신들의 속성을 마음껏 풀어 헤쳐놓는다. 대의민주주의를 이룩하기위한 수단이어야할 선거는 정치적 시나리오를 갖춘 쇼로 전락한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선거권을 행사하는 '주체'의 위치보다는 선거를 바라보는 관객의 위치를 선택한다는 것은 이러한 '쇼'를 묵인한다는 뜻이다. 대의민주주의의 정치적 실천자가 아닌, '쇼'의 연기자 역을 맡는 정치인들은 더욱 자극적인 '작품'을 통한 스타의 길을 걷는다. (가끔 스스로가 정말로 조폭 영화의 주인공이 된 양 착각하는 사람들은 조폭 영화보다 더 자극적인 액션 연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것은 단지 '현실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를 사회를, 역사를 단지 나와 유리된 풍경으로 바라보는 인식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유리된 인식 속에서 정치와, 사회와, 역사에 대한 탄식은 다만 탄식에 그칠 뿐, 정치와, 사회와, 역사를 통해 스스로 '무언가 해보겠다'는 적극적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 이러한 의지의 결여 속에 정치와 사회와 역사는 (남은 몰라도) 나에게는 유무형의 위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을 주고, 세상이라는 풍경은 소비 사회의 다원화된 이미지, 환상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 환상 속에 바로 '그대'가 있다.

2009/05/31 17:50 2009/05/31 17:50
Posted by 프리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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