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2009/09/13 19:09

1. 외국인 노동자는 돌아가라!

- 박재범에 대한 비난 여론 중 대표적인 멘트가 바로 '외국인 노동자는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라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쉽게 알아 챌 수 있듯이 일단  '외국인 노동자' 전반에 대한 혐오감이 섞인 말인데, 그 대상이 박재범이라는게 재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꽤나 양식 있는 척 하는 커뮤니티나 블로그들에서도 이런 반응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어서 꽤 놀라웠는데, 사실 이 것은 다음과 같은 속마음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싶다.

 "한국 와서 돈 벌어서 자기네 나라로 보내고('국부'를 자신의 이익과 동일시 하는 심리),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은 싫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약자 위치에 놓여있는 동남아시아 이주 노동자들을 대놓고 욕하기엔 남들 보기에 껄끄러웠기 때문에 이런 혐오증을 드러내지 못했는데 마침 마음 놓고 욕해도 되는 박재범(연예인이라는 사회적 '강자', 쉴드 쳐주는 '빠순이'와 JYP라는 '빽'을 가졌다, 게다가 불량한 과거가 있고 나라 욕했다는 개념 없는 놈)이 나타났으니 억눌린 혐오감을 표출해보자!"

 이런 속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닌게(물론 당연히 동조는 할 수 없지만) 이러한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 사회적 불만이 팽배한 젊은 세대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독일 네오나치나 러시아 스킨헤드 등의 사례를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다. 다만 그 대상이 박재범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희극이면서, 또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박재범을 욕하는 사람들은 '외국인 노동자'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박재범이 실제로는 '외국인 노동자'처럼 비하와 무시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적 강자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사실 박재범은 정말로 말그대로 '외국인 노동자'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인기 전성기의 아이돌 그룹 투피엠의 리더인 박재범이 '외국인 노동자'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하나 하나 따져보겠다. 왜 박재범이 외국인 노동자인지를.


 이번 일이 터진 바로 그 주, 박재범은 <상상 플러스>에서 아직도 돈 한 푼 시애틀로 보내지 못했다고, 그러니까 돈 좀 벌어야한다고 우스갯소리처럼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 것은 아마 '우스갯 소리'만은 아닐 것이다. 박재범은 3~4년 간의 연습생 생활을 거쳤고, 이제 겨우 데뷔 1년이 넘은 아이돌이다. 'JYP연습생'이라는 것은 뭔가 '있어 보이는' 타이틀이지만, 실은 언제 데뷔할지 모르는 시간을 보내며 연습에 매진해야하는 신분이다. 게다가 중요한 것은, '전속 계약'을 맺지 않은 신분인 기획사 연습생은 개인 활동을 통한 실적이 있지 않고서야 기획사로부터 돈 한 푼 받지 못하는, 경제적으로 완전히 빈곤한 상태라는 것이다. 박재범이 연습생 생활을 어떻게 보냈는지 팬이 아닌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가족과 떨어진 이역만리 한국에서 거주 비용이나 생활비와 같은 것들을 자가 부담으로 버텨야했을 것이다. (비슷한 사정의 연습생이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알게 된 사실이다. 나는 적어도 숙소 정도는 기획사에서 제공해주는 줄 알았다!) 그런 고난의 시절을 보낸 후에야, 그는 아이돌 그룹 멤버로 데뷔할 수 있었고, 그 후에야 드디어 수입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데뷔를 했다고 해서, 또 빠른 시일 내에 인기 전성의 아이돌 그룹으로 성장했다고 해서 바로 돈이 굴러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이미 동방신기 사건의 사례를 통해 알려졌고, 또 아이돌 팬들이라면 자주 줏어들었듯이 이들의 생활비나 전속 스탭 고용비 등은 대부분 기획사가 아닌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부담해야한다. (기획사에서 수익 분배 시 이런 비용을 공제한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기획사 - 아이돌 간의 불합리한 수익 분배 구조가 가지는 문제도 있다. 행사를 한번 뛰면 수입을 반반으로 나눈다고 가정하면, 이를 아이돌 그룹 멤버 수에 맞추어 다시 나누어가진다. 동방신기 같은 경우 방송 출연료도 '고정' 코너가 아니라면 기획사가 거의 다 먹는 계약 조건이었는데, 투피엠이 어땠을지는 몰라도 국내 최고 그룹인 동방신기에 비해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는 못했을 것 같다. 어찌되었든 재범이 방송에서 이야기한대로, "한 푼도 시애틀로 보내지 못했다"라는 것은 아마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재범 뿐 아니라 전체 아이돌 그룹 멤버들에게 '노동자'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박재범은 일단 외국인 '노동자'인 것이다. 지금 재범의 상황은, 말하자면 몇 년간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도제로 일해서(연습생) 이제 겨우 장인으로 인정 받은 상황에서(데뷔) 1년 만에 길드(기획사)에서 쫓겨나 도시 밖으로 추방된(미국 행)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 외국인 노동자에서 '노동자'를 봤으니 이제 '외국인'을 볼 차례다. 많은 이들이 유승준 사건과 겹쳐 보고 있는데, 유승준과 박재범 모두 한국 내셔널리즘의 역린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 문제와 한국 비하라는 것을 건드렸고, 모두 교포 출신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공통점을 가진다. 네이션=스테이트는 '민족(언어/문화/생활 공동체)'이라는 내적 국경과 실체적 국가의 외적 국경이 일치되면서 성립된다. 따라서 생활권이나 문화도 크게 다르고, 국가의 외적 국경에 포괄되지 않는 '교포'(특히 2,3세들)들은 어찌 보면 이 '네이션'에서 배제된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으로 불리는 한인 교포들도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들은 어디까지나 '성공한 사람(민족의 기상을 널리 떨친?)'들에 한정된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교포'들이 가지는 의미는 마치 '멀리 떨어져, 존재만 알고 지내는 배다른 형제'와 같은 것이 아닐까? 성공하면 우리 가족. 실패하면 남남.

 연예계, 특히 아이돌 그룹은 다른 직업군에 비하여 유독 '교포' 출신 비율이 높은 직종이다. 알다시피 아이돌 산업은 그 초창기부터 해외파 멤버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해외파'라는 이미지가 가지는 자유롭고 새로운 느낌이 주 타겟인 청소년들에게 먹혀들어갔기 때문인데,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1세대 아이돌 그룹의 영어 이름 쓰는 해외파 멤버들은 사실 '교포'라기 보다 외국물 몇년 먹은 한국 중상층 유학생(혹은 날라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면서 마치 데뷔할 때는 교포 출신 같은 이미지를 풍기면서 방송활동을 했던 것이다. (모 1세대 아이돌 그룹 리더이자, 요새 예능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모 군은, 사실 영어도 잘 못하지만 데뷔 초만 해도 해외파 느낌을 물씬 냈다..) 이러한 해외파 멤버 몇에,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거칠게 말해서) 가정 환경 좀 안좋고 학교 가는 대신 춤 추러 다니던 청소년들이 플러스 되서 이른바 1세대 아이돌 그룹이라는게 구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돌 시장이 점차 커지고 이런 직종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요새는 아이돌 그룹 멤버들도 보통 중산층 가정 출신에, 어릴적부터 정말 연예계에 가능성을 걸고 연습생부터 온 가족이 '밀어주는' 소년소녀들이 대부분이 되었다. (아이돌이 이른바 '성공 코스'의 하나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반면에, '해외파' 멤버들은 상대적으로 좀 '못 사는' 교포 출신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아이돌 음악의 트렌드 같은 것이 예전보다 미국과 시차가 없어지게 되면서 '외국물 먹은' 애들이 아닌, 정말로 본토 댄스/팝 문화를 호흡했던 '교포' 멤버들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포 사회에서 좀 사는 집안에서 이역만리 한국까지 연예인 시키려고 쉽게 보내지는 않을 것이고, 결국 경제적으로 좀 어렵고, 어떤 '야심'을 가진 애들이 주로 한국까지 가서 연습생을 거쳐 데뷔하게 되는 것인데 박재범이 이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해외파를 자칭했지만 사실 해외파로 부르기엔 좀 민망했던 아이돌 1세대들은 한국 사회나 문화와 충돌할 일이 없었다. 이들은 단순히 대중들로부터 '해외파'라는 이미지의 소비 대상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 역시 얼마 안가서 희미해졌다.) 그러나 정말로 '해외파'인 교포 멤버들은 한국에서 오히려 어떤 문화적 갈등을 빚게 되는 일이 많다. 교포 멤버들의 돌출 발언이나 (주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비춰지는) 감정 기복 같은 것이 파문을 빚는 일이 있는데, 박재범에 대한 이번 여론은 이러한 갈등이 표면화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1세대 아이돌 멤버이 마치 예전의 시트콤 <LA 아리랑>처럼 정말로 '한국인'과 다름 없으면서 외국에서 중산층적 삶을 영위한 '친해지고 싶은 이복형' 이미지였다면, 박재범 같은 진짜 '해외파'들은 LA에서 세탁소 하고 슈퍼마켓하면서 악착 같이 돈을 버는, 조금이라도 추문이 생기면 '외면하고 싶은 이복 동생'이 되는 그런 (실재적) '교포'인 것이다. 박재범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야기했던 '돈' 이야기와 같은 것들이 사건이 터지자마자 수면 위로 부상하여, 까임 대상으로 전환하는 것을 보라. 이 순간 '외국인 노동자'라는 것은 단순히 까기 위한 말이 아닌, 정말로 박재범(혹은 외면하고 싶은 이복동생들=교포)을 '외국인'으로 상정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결국 지금의 박재범은 '정말로' 한국 사회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사각지대에서 외면당하는 것처럼 '외국인 노동자'인 것이다. 따라서 '박재범 사건'은 박재범의 행동에 대한 판단 여부를 떠나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이주 노동자', 그리고 '재미교포'들에 관한 시선을 극명히 드러내는 사례가 되는 것이다.


 2. 아이돌 팬덤 간의 연대는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

 박재범의 2PM 탈퇴에 격분한 2PM 팬(핫티스트, 이하 '핫티')들은 JYP에 대한 불매운동을 선언하고 신문 광고를 내려는등, 또 하나의 팬덤 무브먼트를 일으켰다. 아이돌 팬덤 문화에 호의적인 내 입장에서 상당히 응원해주고 싶은 움직임인데, 문제는 SM과 동방신기의 불공정 계약 문제로 갈등을 벌이고 이미 팬덤 운동에 나선 동방신기 팬덤(카시오페아, 이하 카아)과 '핫티'가 갈등을 빚게 되었다는 것이다.

 상황은 이러하다. 박재범의 탈퇴 이후 핫티들은 JYP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신문광고를 위한 광고 시안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벌이게 된다. 그러면서 팬 조직과 상관 없이 일부 팬들이 카아들에게 메일을 보내 함께 신문 광고를 내고, 기사를 내자는등, '연대'와 '협조'를 부탁하게 된다. 문제는 그 와중에 핫티들이 만든 광고 시안이 얼마전 카아들이 낸 신문 광고 시안을 도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또 탄원서 양식 같은 것도 역시 도용 혐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카아들이 동방신기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문구였던 "Always Keep the Faith" 라는 문구를 핫티들이 무단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문구가 카아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카아들이 이런 것들에 대해 큰 분노를 느꼈다는 것이다. 당연히, 카아와 핫티의 연대는 무산되고 말았다.

관련 링크:

http://poplez.net/xe/?mid=guestbom&page=3&document_srl=3018868

 개인적으로 상당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 물론 핫티들이 팬덤 간의 관계에서 상당히 민감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을 건드리긴 했으나, 거시적 차원에서 유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두 거대 팬덤이 공동으로 행동했다면 상황이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동방신기 팬들은 물론 기획사의 일방적인 불공정 계약에 의해 동방신기를 압박한 '동방신기' 문제와, 본인의 연습생 시절 실수로 의하여 기획사에서 자의건 타의건 탈퇴하게 된 박재범의 경우가 어떻게 같은 것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결국 두 사건 모두 결정적인 부분에서 같은 층위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이돌 그룹의 계약 문제나 탈퇴, 혹은 해체와 같은 문제들이 전적으로 기획사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고, 여기에 팬덤의 의사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는 것, 이 것이 바로 두 사건의 본질인 것이다.

 팬덤이 자기 스스로의 '권리'를 선언할 수 없는 상황이, 한국 아이돌 팬덤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비극인 것이다. 동방신기 팬덤과 투피엠 팬덤은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에서, 서로 힘을 합함으로써 문제 상황을 더 좋은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투피엠 팬들의 부적절한 행동 자체는 타 팬인 내가 보았을 때도 눈살을 찌푸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 최다 인원을 자랑하고 또 다년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동방신기 팬덤, 카시오페아가 신생 팬덤의 이러한 실수를 껴안고, 함께 갈 수는 없는 것인가? 카시오페아가 국가인권위에 제출한 진정서 내용 중에서는 동방신기에 대한 불공정 계약이 SM만의 잘못이 아닌, 국내 연예 기획사 전반이 가지고 있는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카시오페아는 SM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2PM 팬들과 함께 JYP의 문제에도 침묵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닌지? 나는 이러한 점에서, 카시오페아들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상당히 아쉽게 생각되는 것이다.


2009/09/13 19:09 2009/09/13 19:09
Posted by 프리스티

Leave your greetings.

  1. 김요셉

    헌데 무서운 이야기 하나. 박재범 사건이 JYP의 마케팅일지도 모른다는 음모론이 떠돌더군요 으허헛.

    2009/09/14 01:32 [ Permalink : Modify/Delete : Reply ]
  2. 고승철

    그러게요. 너무 조용히 자란 2PM이라. 이슈가 필요했다는 음모론이 있더군요.

    2009/09/14 10:39 [ Permalink : Modify/Delete : Reply ]
  3. 프리스티

    재범을 탈퇴시킨 결정 자체는 동정표를 사려는 JYP의 의도인 것 같은데, 사건 전체를 그렇게 보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네요. 타격이 적지 않은터라..

    2009/09/14 17:57 [ Permalink : Modify/Delete : Reply ]
  4. 프리스티

    http://snlrtm.egloos.com/2426656

    그러나 이미 동방신기 팬들은 갈 때까지 갔고...

    결국 두 아이돌 팬덤이 이렇게 소모적으로 싸우게 되면 팬덤 무브먼트고 어쩌고 다 빠순이 난동으로 취급당할듯 ㄳ

    2009/09/15 19:41 [ Permalink : Modify/Delete : Reply ]
  5. 이지훈

    음모론도 음모론이지만 정말 "생각대로 되는" 세상이 되는 것 같아서요. 그것도 너무 무섭네요. 이번 사건은 순수하게 웹상의 힘으로 현실에 엄청난 영향을 몰고 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요. 박재범 이 놈 썩 나가. 하면 나가야 되는군요. 헐....

    2009/09/15 22:50 [ Permalink : Modify/Delete : Reply ]

공부2009/09/08 18:50
한석정,『만주국 건국의 재해석』, 제 3장 <국군과 경찰> (2)

 오래간만에 만주국 세미나 발제를 작성해 본다. 아직도 만주국에 대한 탐구가 오늘날 한국에서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적 기획(이것이 아나키스트적 전망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을 꿈꾸는 이들에게 매우 유효할 것이라는 데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최근 그나마 약간의 균열들이 주목되고 시작했지만 한국사의 ‘매끄러움’이란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상치되는 돌출부들을 억압하는 한에서만 이루어진다. 만주국은 그러한 돌출부 중 하나이다. 비록 만주국이 한반도의 역사는 아니지만 같은 일제의 준식민지로서 우리에게 복잡한 감정을 자아내는 공간임은 틀림없다. 해서 기존의 민족주의 성향의 한국사 전공자들이 여기서 찾아내고자 했던 것은 식민지로서 당해야 했던 수탈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다뤄왔다시피 사실 무력이 횡행하던 만주 일대를 안정화시킨 것도 만주국이고, 마냥 일본 관동군의 욕심에 만주국이 설립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비적들의 ‘협력’에서 우리는 익히 알 수 있었다. 또한 ‘치욕의 과거’식으로 해석되는 ‘식민지’ 시절이 하나하나 따져보면 심지어 당시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근대 국민국가와도 커다란 차이가 없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오늘부터 다루게 될 것은 억압적인 수탈기지로서의 식민지라는 상을 넘어 본격적인 국민국가로 도약하려 했던 만주국의 모습이다. 다시 말해, 쥐어짜는 ‘병영국가’가 아닌 국민의 안전과 이익을 약속하는 ‘문민국가’의 면모이다.

병영국가 벗어나기의 세계적 경향: 아프리카의 경우

 허나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런 식의 변화가 만주국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제가 아닌 유럽식민지의 경우 20세기를 지나면서 대부분이 ‘군사적인 허물’을 벗기 시작했다. 식민지 관리와 행정은 기존의 무장개척자들 대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민간관료들이 대체하기 시작, 이른바 ‘관료제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런 변화를 촉발한 요인들은 무엇일까? 일단 아프리카만을 사례로 놓고 보자면 크게 4가지 요인을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①반란 등 내부 치안의 문제를 일단락한 뒤 피지배층을 어루고 달래기 위함

②본국의 민간 관리들을 열대지방에 보낼 수 있는 위생 조건의 개선. 위생 사업 자체가 근대의 주요한 조건 중 하나임을 여기서 강조해 놓자.

③본국에서 식민지에 보낼 수 있는 고등교육 이수자가 이 시점에서 드디어 양성. 일종의 청년 실업 해결책으로 식민지의 행정관료가 제시된 것이다.

④당시 본국에서 형태를 갖추어 가던 관료제화 현상의 여파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아프리카의 사례이고 이 4가지 요인들로 해결되었다고까지 말하기는 힘든데 학자들이 게을렀다기보다는 이 지점이 대답해야 할 질문이 꽤 크기 때문이다. 그 질문이란 “외래정복자들이 군정을 쉽게, 아무 세력에 별 구애받지 않고 펼 수 있는 식민지에서 왜 그 통치양식을 바꾸었는가?”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무력으로 치면 제국주의 열강과 피식민지들은 한참 혈기왕성한 대딩과 초딩에 비유될 수 있다. 그냥 꿀밤 몇 대 쥐어박고 삥뜯으면 될 텐데 무엇하러 복잡한 행정절차을 만들고 ‘우리는 하나’니 강조하며 심지어 ‘복지’까지 챙겨주어야 했다는 말인가? 이 질문을 회피하는 것이 식민지 수탈론이다. 그렇게 하면 마음껏 제국주의 국가들을 악마라고 욕할 수 있으니 마음은 편할지 몰라도 학술적으로 엄밀하지 못하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나아가 이는 제국주의를 비판한다는 정치적 목적에도 매우 손해인데 적을 만만하게 평가함으로서 스스로의 주장을 허약한 기반에 위치시키고, 나아가 수탈이 아닌 근대화, 복지 등을 제국주의와 무관한 탈식민화 국가의 특권으로 상승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복지’ 또한 하나의 ‘지배 양식’이라는 것이다. 돼지를 때려서 키우나 꼴을 먹이면서 키우나 인간으로부터 돼지가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 다양한 사료를 놓고 그 중에서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면 돼지는 그것을 자유로 착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군정이 아닌 식민국가’라는 역설?: 만주국의 경우

 일제의 식민지였던 한국에 사는 주로 유럽이 지배했던 아프리카의 사례는 ‘남의 일’로 간주될 수 있지만 흔히 한국 못지않게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는 만주국의 경우는 다르다. 만주국의 사정은 그럼 어떠했을까? 익히 말했듯이 1920년대 만주국 이전의 군벌체제에서부터 일본종부와 육군참모본부의 승인을 받지 않고 관동군의 ‘선전포고 없는’ 전쟁까지, 구체적 사건으로는 만주사변 ․ 러허침공 ․ 군부 내 갈등 ․ 소련과의 국지전 등등, 만주는 끊임없는 무력의 긴장 속에 놓여 있었다. 일본 행정부 군부의 상층과도 중국이나 여타 세력과도 독립적인 관동군이라는 대병력이 주둔한 전진기지라는 특성을 고려해 볼 때, 만주국의 통치에는 ‘군정’, ‘병영국가’가 가장 적합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 농촌의 중국인 지주들이나 도시의 일본인(주로 상공업자) 공동체가 사회적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큰 힘을 행사하지 못했다. 즉 관동군은 당시 만주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만주국의 성장은 군사적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심지어 만주국에서 형식적인 의미에서의 노골적인 군정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1. 민간관료의 등장과 군부의 침묵, 관료제화

  1)민간행정관료의 대두

 전반적인 행정은 군인들이 아닌 민간인들에게 맡겨졌다. 이는 군인들에 의해 운영된 아프리카의 초기 식민행정과의 큰 차이점이다. 이른바 ‘혁신관료’라 불리는 일본인 경제 관료들이 정부의 각 부처의 주요 위치에 포진, 주된 정사를 책임졌다(관료들의 이름은 책 99쪽부터를 참조). 잠깐 옆길로 새자면, 그렇다고 이들이 일본 내에서 비주류 정파에 속해 만주로 쫓겨온 것은 마냥 아니었다. ‘만주 파벌’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마츠오카 요오스케, 키시 노부스케, 그리고 토오죠오 히데키가 포함된 이 파벌은 패망 때까지 일본 정부 내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다시 돌아와서, 이런 일본에서 교육받은 젊은 행정관료들의 유입은 만주국 초기 정부 요직을 차지한 비적․군벌 출신의 중국계 원로 장군들을 대체한다. 군벌이 사라지고 만주 지방의 군사적 색채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2)관동군의 자기은폐

 또한 특기할 점은 관동군은 실질적으로는 무력을 독점한 지배자임에도 불구하고 애써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려 했다는 것이다. 관동군은 만주국 정부에 결코 공개적으로는 지령을 보내지 않았다. 수많은 정부 훈령 중에서 “관동군”이라는 말은 초기 5년간 나타나지 않았다. 만주국에서 관동군의 위상을 감안해 볼 때 이런 침묵은 의도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두 토대, 민간행정관료의 대두와 관동군의 이러한 자기은폐 위에 만주국은 빠르게 관료 조직체로 짜여 나갔다. 서구에서는 적어도 1세기가, 일본에서도 최소 수십년이 걸린 관료제화를 만주국은 그야말로 벼락치기로 이루려 하였다.

  3)벼락치기 관료제화

 우선 건국(1932) 첫 4개월 동안 정부 조직의 기본적 뼈대, 예컨대, 부서간, 중앙부서와 성, 성과 현의 분업, 승진과 호봉체계 등이 만들어져 만주국의 몰락까지 유지되었다. 공보 1호(1932년 4월 1일)에는 관리의 근무시간과 각 부서의 직인을 포함하는 세부사항이 발표됐고, 둘째 달에 공문서 작성과 송달 등의 규칙이 만들어졌다. 첫해 동안에는 경찰의 명찰, 정부 모든 부서의 영문 표기, 촉탁직의 임금 체계, 어려 종의 통계, 간행물 발간 등 전체 관료 조직체를 움직이는 대부분의 규율들이 정해지고 시행되었다. 이런 규칙들은 성긴 일반 목표를 제시하는 걸 넘어 모두 수많은 항목이 부착된, 엄청나게 세밀한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물품회계규칙의 경우, 모든 사무 용품의 모양, 재료, 색깔까지를 명시하고 있었다. 또한 이런 세밀함 이외에도 규칙들은 관료를 단련한다는 교육적 목적 역시 지니고 있었다.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는 지침들이 나열되었다. 행정적 훈련 이외에도 만주국은 관리들의 정신, 도덕성 훈련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정부는 회계상의 독직이나 뇌물 사건을 엄중히 경고하고, 그런 일이 발생했을 시에는 철저한 조사를 명했으며, 심지어 부처 이전 시나 명절에 선물을 주고받는 관습까지도 금지했다. 거의 만주국은 히스테리적이라 할 만큼 관리들을 들볶는데 병가를 받은 관리들의 명단을 공개했으며, 오후의 휴게 시간 단축을 명하고, “게으르고 품위 없는” 관리들의 징계 규칙을 세웠다. 형무소 관리들의 경우, 의복과 청결 사항을 포함하는 260개의 수칙을 지켜야 했으며, 1936년부터는 걸음걸이까지도 점검하는 검열을 실시하였다. 재밌는 것은 이런 엄결한 규율을 지키지 않는 관리들의 직위 남용과 나태함이 발견될 때마다 항상 그것을 “군벌 시대의 폐습이며, 왕도(만주국의 공식 구호 중 하나)의 새 시대에는 있을 수 없는” 짓으로 매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군벌 체제에 대한 만주국 정부의 뚜렷한 청산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런 관리들의 훈련은 뒤에 또(아직 남았다!) 다뤄질 것이다.

 이런 관료들을 위한 규칙 말고 첫해에 주요한 정부 기관과 미래의 국가사업이 형태를 드러내었다. 건국 석 달 안에 이뤄진 일들을 나열해 보면, 소금 전매, 곡물 통제, 국기, 특별시제, 동성 특별구, 감찰원, 중앙은행, 농업협동조합, 통계청, 건국선전협회, 토지국, 몽정부(몽고인 담당 부서), 경찰학교, 경찰청, 특별 경찰, 영사관, 적산대책위원회(군벌 장쉬에량의 재산 처리를 위한), 방역, 사회 조사, 토지 조사, 새 화폐 주조, 새 교과서 저작에 관한 계획 등이 ‘한꺼번’에 만들어 졌다. 잠을 하루에 4시간 주무신다는 분도 울고 갈만큼의 추진력을 만주국 관료들은 보여주였다.

 따라서 거의 매일 정부공보는 새로 만들어진 법령, 규칙, 훈령의 발포과 개정으로 도배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가속화를 가능케 한 데에는 만주국에 ‘의회’, 입법부가 사실상 없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참의부’라는 기구가 있기는 하였으나 ‘의회’라는 간판만을 달아놓고 있을 따름이었다. “의회가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행정부의 결정에 어떤 저항도, 지체도 없는 만주국에서 법령은 쉽게 만들어졌다.” 

 2. 사회의 규율화, 시어머니 만주국

 이 즈음에서 우리는 국민국가 건설에 왜 군정이 적합하지 않은지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얻게 된다. 비록 처음 국가의 업무를 구획지은 것이 군인들이라 할지라도, 국가의 업무 범위라는 것은 군인들이 다룰 만큼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총무청과 함께 중앙 정부의 가장 중요한 조직이었던 민정부가 했던 일들을 보면 그야말로 국민의 ‘시어머니’가 따로 없다. 민정부는 대단한 인력을 부리며 새 건물의 화장실 설계를 조사하고 자전거, 수레, 심지어 개에도 번호판을 발급하고, 기녀들의 보건 상태를 매월 체크하는 등 사회생활 구석구석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기든스가 근대 국민국가의 중요 특징이라 하는 “정보의 비축”에도 매우 적극적이어서 재산, 토지, 건설에 대한 보고는 물론이요 식량 재고, 가구, 위생, 쓰레기 수거까지 포함한 보고가 이뤄졌다. 조금 더 나열해 보자면, 공동묘지, 도로, 전염병 예방, 초등학교 교과서, 종교, 교사, 사당, 사회교육 시설, 도서관, 박물관, 극장, 클럽, 여타 사회오락 시설 등의 조사가 명해졌다. 대도시는 가구 수를 매월, 소도시는 1년에 두 번 보고해야 했다. 민정부는 지방 부서에 약 100개의 훈령을 매년 보낸다. 이런 훈령들은 결코 상징적 효과만을 노리는 데 국한된 것은 아니었는데 이후 동반된 일종의 숙제 검사, 검열과 업무 점수 채점 등에서 정부가 실제로 훈령들이 행해지기를 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군인’이란 국경, 전방이나 변방에서 가시적 무력에 맞서는 데 훈련되어 있는 사람들이지 이런 행정적인 업무의 기획이라든가 시민사회 속에서의 시행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다. 일단 ‘군인’은 ‘민간인’과의 거리에 의해 유지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해서 이런 포괄적인 근대화의 기획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군인은 물론 아닌, 그렇다고 행정에 전념해야 할 관료들도 아니면서 시민사회 ‘속’에서 행동이 자유로운 계층이 필요했다. 이들이 바로 ‘경찰’이다.

  1)만주국 경찰 혹은 제국의 하사관

 사회의 최전선에서 국가가 벌이는 사소한 일을 도맡아 하는 이들은 대부분 경찰이었다. 행정 기구 상으로 만주국 경무사는 민정부에, 지방 경찰청은 성공서에 소속되나, 실제로 그들은 직속 상부에 소속되어있을 뿐 민간인 상사와는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대개 만주국의 정부요직들이 그랬듯이 경무사 책임자 자리도 중국인에게도 돌아가지 않았다. 만주국 경찰은 일반 관료의 몇 배나 되는 인력을 보유했는데, 1935년말 그 숫자는 7만6천여명으로 만주국군에도 도전할 수 있는 숫자였다. 이러한 만주국 경찰의 수는 일본 본토의 것보다도 많았는데, 당시 일본의 인구가 만주국의 두 배임을 감안하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지방의 경우 경찰과 민간인의 비율은 100명당 1명 꼴을 이뤘다. 이런 대규모의 경찰은 단순한 치안 이외에도 수많은 대민 규제 사업을 떠맡는다. 만주국은 외관상 관동군이 최종심급으로 자리잡은 병영국가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경찰국가였던 셈이다.

 일본인 지배자들은 일종의 야심을 가지고 경찰을 양성한 것처럼 보인다. 건국 첫날에 만주국 정부는 모든 지방 관서에 경찰이 되기에 “합당한 사람”을 찾으라는 지령을 내렸고, 1932년 수도에 중앙경찰학교를, 각 성도와 현에 경찰훈련소를 지어 “기본 학력(6년의 초등교육)을 가진 젊고 우수한 남자들”을 미래의 경찰관으로 양성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찰들은 이렇듯 비적과는 연관이 없는 신선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이 처음 맡은 업무는 비적 토벌이었지만 차츰 시장과 거리, 주택, 가게 등 민간사회 쪽으로 업무가 바뀐다. 또 이들의 업무를 나열해 보자면, 넝마주이, 신기료꾼, 우산 수리꾼의 매년 허가증 발급, 지문 채취, 일몰 후 및 옥내 영업 금지가 있다. 소위 ‘잡상인’에 대한 단속이 이뤄진 것이다. 경찰들은 자전거 운전자가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쥐고 타는지”를 감시했으며, 앞서 말했듯이 개와 수레, 인력거에도 번호판을 부착했다. 위험지역의 여행은 단속되었으며, 도로 파손을 막기 위해 차량의 최대 중량을 지정했다. 아편 환자, 기금 출연자, 자동차에 면허증이 발급되었고, 결혼신고서를 포함, 시민들이 써넣을 수백 종의 서식을 배포하며, 수많은 위생 조사 업무, 걸인들을 공공피한소를 데려가며,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상업 범죄자를 체포하고, 청소 캠페인을 벌이고, 극장, 여인숙, 점쟁이들을 조사하며, 소위 불순분자들을 반년 혹은 한달마다 감시했다. 1936년 한 해 동안만 경찰이 이 과정에서 약 8만 5천명을 체포한다. 민정부나 기업은 경찰에 사실상 모든 업무의 시행을 의존하게 된다. 이런 경찰의 활동을 가능하게 한 데에는 약 9만 3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경찰용 전신망이 큰 역할을 한다. 이런 통신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경찰은 정신없이 시민들을 달달 들볶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석정 씨는 아마 만주국 경찰이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라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들볶인 것은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각종 강습(1936년 한 해에 29개의 강습이 열렸다 한다)을 받았고 훈련 센터에 보내졌다. 1935년 중앙 경찰은 매주 경찰의 의복, 소지품, 훈련 상태(발걸음 포함)를 검사하는 몽고지역 경찰의 관행을 채택했다. 경찰은 매년 여러 종류의 검열을 실시하고 이 해 10월부터는 매일 한 시간씩 두 종류의 훈련(일반강습과 신체단련)을 받았다. 비록 훈련과 공무 집행에는 후한 보너스가 따랐지만 이런 단련은 격한 것이었고 또 많은 인력이 교체되기도 한다. 건국이래 경찰에 들어왔다 퇴직한 사람들은 1936년 말 1만 5천명에 달한다. 이는 전체 경찰의 20%가 교체되었음을 의미한다. 첫 5년동안 약 5천 명이 해고, 3천 명이 감봉, 1천 2백명이 견책되었으며, 약 9천명이 질병 및 기타 원인으로 사직하고, 약 700명이 순직한다.

  2)인민들의 교육

 일찍이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의 지배적인 권력기제를 주권권력이 아닌 규율권력으로 정의한 바 있다. 그런 규율권력을 사회적인 레벨에서 실천했던 ‘장치’가 경찰이었다는 것(물론 경찰 자신도 규율의 대상이었다)을 알았다면 그런 규율권력의 내용, 표상하며 인민들에게 요구했던 바가 무엇인지 다뤄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경찰의 업무들을 나열하며 많은 부분들이 이야기되었지만 말이다. 건국 다음달 만주국 정부는 두 개의 서로 관련되는 명령을 발행하는데 ‘새 교과서 편찬 계획’과 ‘체육대회’였다. “하나는 인민들의 정신을 통제하고, 또 하나는 신체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만주국 정부는 학교 체제, 교과목, 교과서 등을 완전히 새로 만든다. 교사 자격 역시 강화되어 전과가 있는 자는 교사가 될 수 없었다. 새로운 교과목인 수신과 강격이 만들어져 건국정신, 만주국인의 의무, 유교 정신 등이 강조되고 옛 교과서의 해악적 요소들 항일 성향의 가요, 일본 제국주의 비판, 국민당 찬양 등의 것을 없앤다. 문교부는 학생들의 의복, 식사, 두발 등과 관련되는 수백 개의 훈령을 학교에 보낸다. 장발, 음주, 흡연은 엄금되었다. 모든 교과서, 그리고 동화책은 문교부에 의해 선정되었다.

만주국 정부는 건국 첫 해에 학생들과 관리들을 급히 모아 “건국정신을 양양하기 위해” 체육대회를 거행한다. 이후 지방 관서에 현존 체육시설 현황과 개선책 연구를 명했고 “국민체육운동”이 벌어진다. 1933년에는 “국민의 건강을 증진하고 민족협화를 실현하기 위한” 만주국 체육협회가 발족되고 각 지방에 지회가 만들어진다. 문교부와 모든 성, 현공서에 건국정신, 민족협화, 유교정신, 위생, 보이스카웃 등에 관한 강습과 문화시설(도서관, 강습장 등) 유지를 맡는 부서가 생긴다. 모든 현공서는 ‘민중교육관’을 설립하고 그 실적을 보고해야 했는데 교육관의 운영은 글읽기, 시민정신, 생계, 건강, 유희 교육 등 5개 목표를 가졌다고 한다. 교양부터 오락까지 죄다 국가가 일일이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사회교육’에 정부는 큰 기대와 노력을 투자했다. 현공서에서 사회교육을 담당하는 관리는 문교부에 올라가 새로운 강습을 받아야 했으며, 개중에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일본에 유학을 다녀오는 이들도 있었다. 만주국은 러허를 침공했을 때도 가장 먼저 교육관을 설립하여 큰 예산을 할당, 특별 강습들을 실시했는데 이는 사회교육이라는 것이 새 국가를 건설하는 것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데 보여주는 사례이다.

2009/09/08 18:50 2009/09/08 18:50
Posted by 프리스티